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문화 공약은 역대 어느 대선에서도 무게감 있게 다뤄진 적이 없다. 사회, 경제, 안보, 노동, 복지 등 현안이 산적한 대한민국에서 '문화'를 앞세우는 것은 '배부른 소리나 하는 한가한 사람'으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번 대선에서 문화 공약이 공식적으로라도 거론된 것은 지난 정부 때의 국정농단 사태 덕분이다. 집권 초기부터 '문화융성'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은 최순실·김종·차은택 등의 입김에 휘둘리다 엉망이 됐고, 결국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점철되며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재인 제19대 대통령의 문화 공약에 새삼 관심이 높아진다. 특히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크게 분노했던 문화예술인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문화융성'이 아니라, '문화의 갱생(更生)'을 바란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문화예술 독립성·다양성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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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부의 '적폐'로 규정했으며,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겠다고 했다. 앞서 지난달 25일 국회 입법조사처 대회의실에서 열린 '차기 정부 문화정책 세미나'와 그 이튿날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2017년 대통령선거 후보자 캠프 초청 문화정책 공개토론회' 등에서도 당시 문 후보 측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예술의 자유가 블랙리스트로 침해당한 점 △예술인들을 지원해야 할 문예진흥기금이 고갈돼 창작지원이 끊긴 점 △예술인들에게 돌아가는 수익 분배구조가 불공정한 점 △소득·지역·연령 등 제한 사유가 많아 문화향유가 이뤄지지 않다는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문화·예술의 독립성과 다양성 확보를 위해 정부·지원기관·문화계 간 '공정성 협약'을 맺는 것도 제시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공약으로는 예술인 복지 강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문 대통령은 유네스코 '예술가의 지위에 관한 권고'를 참고해 예술인의 정신적·경제적·사회적 권리 보장의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으며, 예술인의 공정한 보상을 위해 표준계약서 의무화, 저작권 수익분배기준 강화, '임금채권보장법'에 준하는 예술인 체불수입 보장제도 등를 실시하기로 했다.
◆공약대로만 되면 다행··· 문제는 실현 가능성
일상에서의 문화 향유를 위해 문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생애주기별 문화예술교육이다. 이는 핀란드의 아동·청소년 예술교육 기관인 '아난딸로'(Annantalo)와 비슷한 개념으로, 마을 유휴 공간을 활용해 작은 미술관, 작은 영화관, 마을 극장 등을 조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국가 차원에서 매장문화재 발굴비용 지원을 확대하고 선진적 문화재 방재시스템을 구축해 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 문화유산 가치 제고 등에 신경을 쓸 것이라 밝혔다. 이 밖에 문화균형지수 개발, 지역문화재단 독립성 보장 등 문화균형발전을 위한 공약도 있다.
문화예술인을 비롯한 국민 대부분이 지난 정부의 문화정책에 환멸을 느낀 터라 문 대통령의 공약은 더욱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이다. 문화계 내에서 "뭔가 바뀌긴 하겠지만 선언적 공약에 그치고, 선명한 실행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지난달 25일 열린 차기 정부 문화정책 세미나에서 윤정국 한국문화경제학회 부회장은 문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주요 대선후보들의 문화공약에 대해 "정책은 결국 재원과 법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전반적으로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해 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당장 내년에 고갈될 것으로 전망되는 문화예술진흥기금에 대해서도 국고지원 확충 이외에는 마땅한 재원 조달 방법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이다.
4년여간 '문화융성'에 낙담한 국민에게 '문재인 정부'는 향후 어떤 문화 로드맵을 제시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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