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명의 엄청난 갤러리에 둘러싸인 마지막 18번 홀(파5) 그린 위.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평정한 박성현(24)과 지난해 LPGA 투어 신인왕 전인지(23)가 차례로 퍼팅을 마친 뒤 고진영(22)이 생애 첫 LPGA 투어 우승 퍼팅을 위해 나섰다. 첫 번째 퍼팅은 빗나갔지만, 우승은 고진영의 차지였다.
고진영은 그토록 바라던 첫 우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전인지, 박성현, 캐디와 포옹을 나누는 사이 두 눈에는 서서히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지만 격하게 기뻐하지 않고 가슴으로 우승의 감격을 느꼈다.
지난 15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클럽 오션코스(파72)에서 마감한 LPGA 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의 주인은 고진영이었다. 최종합계 19언더파 269타를 기록하며 아홉 번째 LPGA 투어 대회 출전 만에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이번 대회 우승은 고진영에게 의미가 크다. 2015년 처음 출전한 브리티시 여자오픈 준우승의 아쉬움을 씻어내며 LPGA 투어 직행 티켓을 따냈다. 특히 박성현을 비롯해 세계 톱랭커들이 모두 출전한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이뤄내 ‘2인자’ 딱지도 확실히 뗐다.
이제 선택의 주사위는 고진영의 손에 쥐어졌다. 당장 내년부터 미국 진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진영이 원하지 않으면 그 시기를 미룰 수도 있다.
일단 고진영은 신중한 입장이다. 이 대회 우승 전에도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며 “지금은 KLPGA에 더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승을 이룬 뒤에도 “LPGA 진출은 아직 모르겠다. 혼자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팀, 부모님과 충분히 상의한 후 결정하겠다”며 서두르지 않았다.
고진영은 올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상반기 내내 우승을 이루지 못하다 8월 하반기 첫 대회였던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 시즌 첫 승을 이뤘다. 이어 지난달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타이틀 방어에도 성공했다. 하반기 들어 우승을 간절히 원했던 대회를 모두 석권한 셈이다.
고진영은 올해 샷이 더 견고해졌고, 정신력은 더 단단해졌다. 조급했던 마음을 다잡으며 여유도 생겼다. 치열하게 경쟁했던 골프를 조금씩 즐기기 시작한 것. 그만큼 필드에서 미소도 늘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까지 이루는 과정은 성숙해진 고진영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까지 계획보다 이르게 ‘신데렐라’ 타이틀을 얻어 미국 무대에 도전한 선수들이 모두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다. 부푼 꿈을 품고 도전했다가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 과정이 있어야 성공 확률을 조금 더 높일 수 있다.
골프에서 완벽한 선수는 없다. 절정에 오른 선수도 거짓말처럼 미끄러질 수 있는 예민한 종목이다. LPGA 투어 직행 티켓의 행운에 도취돼 꼭 서두를 필요는 없다. LPGA 투어 환경은 낯설고 외로운 싸움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됐을 때 떠나도 늦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짧은 전성기가 될 수 있는 상승세의 타이밍도 놓치기 힘들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선택은 결국 고진영의 몫이다. 행운의 주인공이 누구라도 고민스러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다른 ‘신데렐라’와 달리 KLPGA 투어 4년간 통산 9승을 수확한 고진영의 미국 진출 자격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장고에 들어간 고진영은 “지금은 남은 국내 대회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