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창장(長江)과 자링강(嘉陵江)이 합류하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지어진 요새라는 뜻으로 ‘산수지성(山水之城)’이라 불렸다. 한 나라때는 강을 끼고 있다고 하여 강주(江州)로도 불렸다. 중국고전 '삼국지'에서 강주성은 촉 나라의 관문이다. 난세 속에서도 외부의 침입을 허용치 않았던 천혜의 요새다. 용맹을 떨친 장비조차 힘만으로는 빼앗지 못해 계략을 써서 얻은 게 강주성이다.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패한 국민당 정부가 충칭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이곳에 있었던 것도 험한 산세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60년대 냉전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미국 소련의 군사공격에 대비해 ‘제3선 건설’을 추진하며 연해지역의 군수·화공·철강 등 산업 시설을 충칭으로 옮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탄탄한 중공업을 바탕으로 충칭은 70년대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쓰촨(四川)성의 한 도시로 편입돼 있던 충칭시 경제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충칭시가 벌어들인 세수의 대부분은 쓰촨성 성도인 청두(成都)에 집중됐다. 개혁·개방 이후 상하이 등 동부 연해지역에 발전이 집중되면서 충칭시는 중국 고속 경제성장에서 소외됐다.
충칭 수상교통로의 심장부인 차오톈먼(朝天門) 부두에는 창장 물줄기를 따라 상하이~충칭을 오가는 대형 선박과 컨테이너선으로 하루 종일 붐비기 시작했다. 창장 뱃길이 상하이~충칭 간 철도 8개 노선과 맞먹는 물동량을 처리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를 기반으로 충칭시는 서부 내륙의 풍부힌 지하자원을 충칭에 모아 선적하고, 상하이 등 동부 첨단 제품이 서부 내륙으로 들어오는 중국의 물류 허브로 자리잡았다. 지난 2011년엔 중국 충칭과 독일 서부 뒤스부르크를 잇는 총 거리 1만1000㎞의 위신어우(渝新毆) 화물열차도 개통됐다. 이처럼 오늘날 충칭은 유라시아 교두보 역할도 하며 일대일로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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