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김지은씨가 경찰에 2차 피해를 수사해달라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김씨가 지난 8개월간 네 차례 걸쳐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히자 “오랜 연인관계였다”, “배후에 ○○가 있다”, “왜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냐” 식의 반응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아닌 제3자를 대상으로 고발장을 접수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법적 공방이 시작된다고 해도 김씨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2차 피해는 성범죄 피해자를 위축시키고, 낮은 범죄 신고율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번 수사가 성범죄 2차 가해자들에게 유의미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주목받는 이유다.
19일 경찰 및 법조계에 따르면 김씨를 지원하고 있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 측은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2차 피해를 수사해 달라내는 내용의 고소장을 경찰에 제출했다. 가해대상자는 상명불상으로, 주요 혐의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명예훼손)이다.
피고발자인 전성협 측은 “김씨에 대한 허위사실이나 음해성 글들이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초 전성협은 국가·언론·찌라시 유포세력·악성댓글 등 2차 가해행위 전반에 대한 책임을 물을 계획이었지만 막판에 전략을 수정했다. 배복주 전성협 대표는 “성폭행 피해자에게는 국가, 언론, 악플 등 다양한 주체의 2차 폭력이 가해지지만 이를 법원에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렵다”며 “가해자의 범위가 넓어지면 수사에도, 법적 책임을 묻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성폭행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란 범죄 피해 이후 사법기관, 언론, 의료기관, 가족, 지인 등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피해자가 정신적·사회적 피해를 입는 것을 뜻한다. 이미경 한국 성폭력상담소장은 “성폭력의 경우 일반 범죄와 달리 성과 관련된 모욕과 사생활 침해로까지 이어져 피해자의 고통과 분노를 가중시킨다”며 “특히 2차피해는 다른 성폭력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들어 낮은 신고율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성폭행 2차 가해 행위에 대한 양태는 다양하다. 경찰의 수사미진과 검찰 수사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인권침해가 대표적이다. 언론기관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누설하거나 가해자 가족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피해재연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사기관, 의료기관의 인권침해 등도 있다. 선정적 보도경쟁으로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언론과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특정세력, 익명성에 기댄 악플 등도 심각하다.
그러나 법원이 성폭행 사건 진행 및 수사과정에서 2차 피해를 인정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와 관련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거론된 상징적 사건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경찰이 공무 집행상 자행한 성폭력으로 인한 원고의 정신적 손해를 국가가 배상하라는 내용의 소송으로 재판부는 이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처음 인정했다.
2000년대 이후 성폭력 사건의 2차 피해와 관련된 국가상대 손해배상 소송 흐름을 보면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등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기각됐다.
실제 2003년 강간 피해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찰은 112신고 상황처리 위반, 범죄수사규칙 위반, 수사시 피해자보호지침 위반, 수사 지연 등으로 피해자에게 2차피해를 가했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는 2005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울산지방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기각했다. 2005년에는 성폭행으로 임신한 미성년자가 검찰의 낙태지휘 거부로 피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지만 서울중앙지법은 낙태지휘는 검사의 직무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며 이를 기각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의 경우 극히 일부분만 2차 가해자의 책임이 인정됐다. 이 소송은 밀양에서 집단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중생들에게 경찰이 가한 인권침해가 주된 내용이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언론에 피해자들의 인적사항을 누설하고 진술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거나 가해자들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결국 서울지법과 고등법원으로부터 국가책임 등을 인정받는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 중 2차 피해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실제 A씨는 한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이후 고소 절차를 진행했지만 무혐의로 결론 나 오히려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했다. 담당 검사로부터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는데 왜 피하지 않았냐"는 등의 질문 세례도 받았다. 또 다른 여성인 B씨 역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이후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사로부터 ‘왜 동맥이 아닌 정맥을 그었냐’는 질문을 받았다. B씨가 성폭행을 당한 이후 자살 시도를 했던 부분을 재차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법조계 관계자는 "성폭력 2차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에서는 경찰이나 검사, 언론 등 2차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위법성 판단이 관건"이라며 "다만 위법성의 판단 기준은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 현저하게 불합리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인데 사실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어 판사 재량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최근 법원에서는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대법원은 미투 운동이 주요 안건으로 떠오른 이후 성폭력 범죄전담 법관 연수를 계획 중이다. 또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문할 때 피고인을 퇴정시키고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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