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독립운동가로,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안동이다. 세도가 안동김씨 일문이었으나 서얼이었기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해, 외교통상 분야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능력과 인품을 아낀 고종의 배려로 41세(1886)에 과거 급제하고, 주일공사(1887)로 4년간 일본에 주재했다.
김옥균,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과 교류했으며, 갑오경장(1894) 당시 군국기무처회의원, 외부협판,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했다. 독립협회(1896) 창설의 주역으로서 독립문 편액을 썼으며, 대한협회(1908) 회장에 취임해 <대한민보>를 발행하며 국권회수운동에 나서 매국단체 일진회와 대립했다.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1919년까지 두문불출하다가, 3․1운동 직후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과 함께 대동단을 결성해 총재를 맡았다. 그해 10월 아들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고문 및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동농은 신문물 도입 및 제도개혁에 앞장서며 애국계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로 유명했을 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도 능통했다. 1922년 상하이에서 순국, 쑹칭링능원에 묻혔다. 국가보훈처는 ‘남작 작위를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으나, 그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에게는 각각 독립장과 애족장이 서훈되었다.
김자동,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푸른역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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