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210] 전통 유목사회는 어떻게 붕괴돼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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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8-04-0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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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얄타회담, 외몽골 현상유지 결정

[사진 = 얄타회담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전후(戰後) 국제정치의 틀을 결정하는 회담이 열렸다.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비공식적으로 언급됐던 이 회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참석한 이 회담에서 전후 몽골의 운명도 정해졌다.

‘몽골인민공화국은 현상을 그대로 유지한다.(Status quo)’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2차 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패망 이후 몽골의 운명은 얄타회담에서 제시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진 = 몽골 건국기념일 행사]

1,945년 10월 20일 외몽골에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반대가 한 표도 나오지 않는 기묘한 결과로 몽골의 독립 의지가 확인됐다. 중국도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1,946년 1월 몽골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그해 11월 소련도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했다.

▶새 정주도시 울란바토르
2차 대전 후 외몽골의 국제적 위치는 한결 나아졌다. 2차 대전 전에는 거의 유일한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고립된 입장이었다. 하지만 전후 동유럽에서 많은 유사한 위성국들이 출현했다. 또 북한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국가들이 아시 아와 아프리카에 등장했다. 몽골은 이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큰 무리 없이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 = 울란바토르 전경]

그래서 소련과 동유럽의 원조아래 새로운 국가건설 작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수도 울란바토르도 근대 도시로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주요 시설들은 할힌골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온 관동군과 민간인등 일본 포로들의 강제노역에 의해 건설됐다. 당시 도시 건설에 투입된 일본인 포로는 만 2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천 6백여 명은 몽골에서 사망하고 나머지 만 여명은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울란바토르는 이후 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중국의 원조를 받아 점차 근대도시의 모습을 갖춰갔다. 과거 카라코룸과 같은 유목민들의 정주도시 울란바토르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급속히 늘어난 도시 인구

[사진 = 몽골 국립 오페라하우스]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몽골의 도시화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상당수 유목민들이 초원을 떠나 도시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1,919년에 5만 명 남짓했던 도시인구는 사회주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하는 1,959년에는 18만 명으로 늘었다.

[사진 = 울란바토르 거리의 몽골인]

울란바토르도 인구가 10만을 넘어섰다. 1,963년에는 40만 명을 넘어섰고 1,979년에는 81만 명에 이르렀다. 1,986년에 도시 인구가 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전체 몽골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서 거주하는 상황이 됐다.

몽골이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로 전환했던 1,991년에는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12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6.5%가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더 이상 몽골을 유목문명권 국가라고 말하기 어렵게 됐다.

[사진 = 툴강서 본 울란바토르]

그렇다고 농촌과 초원의 인구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넓은 땅에 적은 인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출산을 장려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19년에 58만이었던 농촌 인구는 조금씩 늘어나 1,991년에는 95만에 이르렀다.

▶1959년 목축업 집단화 완료 단계

[사진 = 울란바토르 근교의 양떼]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몽골이 가장 강하게 밀어 붙인 정책이 바로 목축업의 집단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까지 몽골 GDP의 90%를 목축업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거 유목의 나라 몽골에서 사회주의 경제 실현의 바로미터는 바로 목축업의 집단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 = 나담 경기장의 몽골인]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반발 등으로 초반기에 실패했던 목축업의 집단화 작업은 1,930년대 후반부터 완만하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 국가들과 보조를 맞춰 1959년에 거의 완료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유목민 99.6%가 농목업협동조합(農牧業協同組合)인 네그델(Negdel)에 가입했다.

세계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이 1,959년을 목표로 앞 다투어 집단화를 선언했다. 몽골도 여기에 보조를 맞춰 집단화를 이루었다.

▶목축 집단화, 개인 소유 일부 인정
몽골의 목축업은 원래 소규모 가족 단위로 유목하는 형태였다. 그 것이 몽골의 목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일종의 친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호트 아일’(이동을 같이 하는 유목집단)이 여러 종류의 가축을 공동 관리했다.

그러나 농목업협동조합인 네그델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는 ‘소리’라고 불리는 소규모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 형성됐다. 그러니까 최 말단에서 가족 단위를 기반으로 하는 유목이라는 사육형태는 변하지 않은 셈이었다. 다만 그 것을 통합한 네그델이 만들어지면서 가축의 소유가 네그델로 이전됐다. 네그델은 기능면에서 소련의 콜호즈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사진 = 나담 경기장의 몽골인]

따라서 그 자체가 지방행정의 최소 단위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네그델은 중국이 1,958년 농업 집단화를 위해 만든 인민공사(人民公社)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네그델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몽골은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기 때문에 일정 수의 가축에 대한 개인 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소련이 집단 농장을 운영하면서 개인 소유의 채소밭(아가로드:Огоро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런 형태로 집단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1,990년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네그델이 해체될 때 목축부분에서 큰 혼란 없이 ‘호트 아일’을 부활시키는 데 큰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정주형 집단목축의 실패
그러나 그런 방법의 정주형 집단 목축은 근본적으로 성공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몽골의 자연환경이 정주형 집단목축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몽골의 초원은 표피층이 얇은데다 강우량이 적어 초지의 재생산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경제적 규모의 초지를 조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진 = 초원의 게르]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집단목축이 도시 주변 지역으로 몰리면서 일정지역의 초원을 과대 사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의 훼손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유목방식에 익숙한 유목민들에게 목축의 집단화는 기존의 문화와 맞지 않아 적지 않은 갈등을 빚었다.

▶집단 유목민 빈곤층으로 전락

[사진 = 유목민 말 사육]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집단 유목민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득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해 집단 유목민들은 상대적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목축의 집단화가 실시된 지 20년 후인 1,980년의 각 직종별 소득 수준을 보면 집단 유목민의 평균소득이 2,430투그릭 인데 비해 공장 노동자 6,010투그릭, 건설노동자는 6,450투그락, 운수노동자 7,880투그릭 등으로 나타났다.
 

[사진 = 이사하는 유목민]

그러니까 집단 유목민의 소득이 다른 직종에 비해 소득이 절반도 되지 않으면서 계층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도시화가 촉진되고 유목민이 사회 저소득층으로 내려 앉으면서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몽골의 전통 유목사회는 서서히 붕괴돼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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