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클린턴한테 안 질끼다.”
김영삼 전(前) 대통령은 1993년 7월 한국을 찾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청와대 녹지원 조깅을 앞두고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각오를 다졌다.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조깅 외교'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다. 두 정상은 당시 청와대 녹지원에서 15분 20초 동안 함께 조깅을 하면서 친분을 다졌다. 그해 11월 김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주변 조깅 트랙을 함께 달렸다.
김 대통령이 자기보다 스무살 가까이 어린 클린턴 대통령에게 뒤지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은 우리 외교사에 '진기명기' 장면으로 남았다. 이렇게 두 정상은 달리기로 교감을 나눠 1차 북핵 위기를 극복했다.
김 대통령의 달리기 사랑은 유명하다. 지난 2015년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했을 당시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가 트위터와 블로그를 분석한 결과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언급된 생활 단어 가운데 1위는 1만4793회 언급된 단어가 ‘조깅’이었을 정도다.
해외에도 달리기로 정치력을 십분 발휘한 인물이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아래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낸 요슈카 피셔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달리기를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피셔는 1996년 당시에만 해도 와인을 좋아하는 112㎏의 거구 정치인이었다. 정치적 시련을 겪을 때마다 찾았던 기름진 음식과 와인이 그를 살찌웠다.
하지만 뚱뚱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 방법 중 가장 먼저 택한 것이 달리기였다.
물론 술과 담배 그리고 기름진 음식도 끊었다. 그는 6년 만에 75㎏으로 체중을 줄이고 건강을 되찾은 것은 물론 정계에서도 다시 상승세를 탔다. 그는 직접 쓴 ‘나는 달린다’라는 책에서 독일 녹색당 당수로서, 전국을 달리면서 선거유세를 지원한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정치에 다시 달리기가 화제다. 특히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력 정치인들이 마라톤 대회에 대거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일 한국노총 주최로 서울 광화문에 진행된 노동절 기념 마라톤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장병완 민주평화당 원내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모습을 보였다.
박원순 서울시장, 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 이재명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 등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들도 참석해 표심몰이에 나섰다.
최근 정치인들이 대회 참가 유무를 떠나 축사라도 하기위해 각종 대회에 얼굴을 비치는 이유는 다른 활동보다 짧은 시장에 많은 유권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건강한 모습을 대중들에게 노출하면서 상대후보 보다 건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정치 공학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달 29일에는 안철수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가 2018 서울 하프마라톤 대회의 10㎞ 부문에 참가해 완주했다.
자유한국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섰던 박종희 전 의원은 지난 3월 포천에서 수원까지 3일간 120㎞를 달리며 ‘마라톤 출사표’를 던졌다. 비록 남경필 현 지사에게 졌지만 박 전 의원의 달리기는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을 지내고 이번 지방선거에서 충남도지사에 출마한 4선 양승조 민주당 의원도 빼놓을 수 없는 마라톤 마니아다.
그는 42.195km 마라톤 풀코스를 9번 완주할 정도로 강철 체력을 자랑한다. 지난 1월 충남도지사 출마선언 당시 이 사실을 언급할 정도였다. 이번 선거전에서도 마라톤을 통한 열정과 의지를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4월 민주당 소속 조승래 의원(대전유성갑)은 '4.23 기적의 마라톤'에 참가해 처음으로 완주했다. 대전지역 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이 대회에 대해 조 의원은 당시 "둘째 아이가 장애를 겪고 있다. 재활병원 건립의 필요성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매년 기적의 마라톤을 완주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시교육감 예비후보로 등록한 함진홍 예비후보는 부산 곳곳을 달리며 선거운동을 해 '철의 여인'으로 불린다. 그는 마라톤 애호가로 100㎞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을 수차례 완주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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