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착하지 않음이 어떻게 착함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들 중 일부는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 맞춤법도 모른다. 언어의 맞춤법만 모르는 게 아니라, 윤리의 맞춤법도 모르고 사회의 맞춤법도 모른다. 삶의 맞춤법도 모르고 가치의 맞춤법도 모른다. 그들은 오직 조직의 맞춤법만 안다. 그들이 '착하다'는 의미는, 조직의 룰들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게도 착한 일인 줄 안다. 그러기에 그 패악의 상징들도 본성적으로 착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다만 착함과 악함의 분별을 심어주지 못한 것일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되 세상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는 점이다. 밑바닥 인생인 우리들도 착하게 살고싶은데 우리보다 상류에 있는 너희들은 착한가? 우리는 일년에 한번씩 사시미칼로 난도질을 해야 기껏 뉴스가 되는데, 형님들은 왜 날마다 뉴스가 되는가. 착하고 착하지 않음은 배운 것과 배우지 않은 것의 차이가 아니고, 배운 것들을 배신하는 나쁨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길도 가보고 저 길도 가봤는데, 결국 한 길서 만납디다. 이정표엔 이렇게 써있습디다."
차카게 살자
세상은 공평하다. 밑바닥부터 강남꼭대기까지 다 누릴 수 있는 '칸트 도덕률'을 발견한 셈이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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