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소년의 생일 축하곡
6월 12일을 제안한 건 트럼프였을까, 김정은이었을까. 1988년부터 13년간 김정일의 전속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1992년 1월8일 원산초대소 오전 11시30분. 김정일이 생일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까만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소년 하나가 입가에 쑥스런 미소를 띠며 걸어왔다. 소년 옆에는 남매인 김정철, 김여정이 있었고, 뒤에는 부인 고영희(김정은의 어머니, 김정일의 4번째 부인)와 김옥(김정일의 또다른 부인)이 함께 들어왔다. 연회장의 테이블 위에는 메뉴판과 함께 노래 가사가 적힌 인쇄물이 있었다. ‘발걸음’이란 제목의 노래였다. 파티가 시작되자 보천보전자악단의 연주가 시작됐다.
이날 처음 공개한 이 노래는, 김정은을 위한 곡이었다고 한다. 작은대장은 9살 김정은을 가리켰다. 2월의 정기는, 1942년 2월16일 태어난 김정일을 찬양하는 표현이었다. 왜 하필 아홉 살 때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에게 ‘후계자’를 암시하는 이런 노래를 지어줬을까. 후지모토의 설명은 놀랍다.
김정일은 바카라(카드 석장으로 합계 숫자의 끝자리수 크기를 가리는 게임) 트럼프광(狂)이었다. 9는 바카라에서 가장 유리한 숫자이며 그에게 행운을 암시하는 숫자였다는 것이다. 9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한 것은, 네째 부인 고영희 소산에다 둘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걸었던 기대를 의미한다. 9를 좋아하는 김정일에겐 자신의 생일이 2월16인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전용차 번호판이 216으로 시작하는 것, 2165555의 전체 숫자를 합치면 9가 되는 것도 그런 믿음에서 나왔다. 김정은의 생일 1월8일 또한 합치면 9이다.
# 열차 안에서 17세가 토로한 북한경제난
북미회담 날짜인 6월12일은 김정은은 아버지 생일을 거꾸로 한 숫자이며. 합치면 9가 되는 숫자이다. 북한이 이 날짜를 제안했다면, 김정은이 이 회담에 대해 명운을 걸고 큰 ‘베팅’을 다짐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2000년 김정은은 원산초대소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 후지모토와 5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다. 17살 소년은 중얼거렸다. “우리나라는 공업기술이 뒤떨어져 있어요. 자랑할 지하자원은 우라늄 밖에 없고...원산초대소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정전이 발생했고요.” 그러면서 스위스 유학시절의 힘겨웠던 일을 털어놨다. 유럽에서 북한 실상에 대한 ‘각성’을 했을 그 소년이, 18년 뒤 북한의 지배자가 되어 대담하게도 싱가포르까지 날아와 트럼프 미국대통령을 만난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정은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도 분분한 해석이 나왔다. ‘김정일 프레임’의 탈피를 공언한 말이라는 풀이도 있었다. 북한 체제의 경영에 대한 자아비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 언론인은 말귀를 못 알아들은 해석이라고 일갈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는, 북한 발목이 아니라 김정은과 트럼프의 발목이라는 것이다. 회담을 하는 양쪽을 가리켜 ‘우리’라고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후자의 해석이라 해도, 여전히 ‘우리’ 속에는 북한 혹은 김정은이 들어있는 만큼 중인환시리의 공식석상에서 드러내기 어려운 ‘일정한 반성’을 대담하게 꺼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반성은, 아까 후지모토에게 말했던 17세 소년의 문제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 CVID는 '신뢰' 대신 채우는 올가미?
트럼프가 회담 합의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의 협상 의지를 극구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핑크빛을 날리는 것은, 사업가의 허풍일 뿐일까.
첫 북미정상회담이 거둔 성과는, 김정은이 보낸 눈짓에 트럼프가 일단 베팅을 해준 것에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북한 내부에 엄청난 변화를 설득할 시간과 ’동기‘를 부여하는 단계 전략의 첫 단추였다는 얘기다.
CVID와 CVIG. 이 암호같은 말에 숨어있는 진짜 뉘앙스는 뭘까. 완전하고 확인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와 그런 (체제)보장. 동어반복같아 보이는 말들을 겹쳐놓은 까닭은, 핵폐기와 체제보장에 대한 상호 신뢰가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못 미덥기에 말로써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를 만들자는 의욕이 용어 속에 들어있다. 회담을 하는 양쪽은, 저것을 내주는 순간 그것에 대한 완전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김정은 이번 만남을 위해, 체면을 꺾고 한번 거절당한 회담을 다시 살려내기까지 했다. 필생의 트럼프 게임을 하고자 ‘9’의 승부수를 던지고 간 건 아닐까.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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