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7월 5일. 흰색 모자에 회색 싱글버튼 슈트, 빨간색 구두를 차려입은 39세의 조병기씨가 부산땅을 밟았다. 그는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서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넝마를 입은 채 사람을 피해 숨어 지냈다. 10년 전에 이미 태평양전쟁이 끝났다는 것도 모르고 혼자만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빈농 출신인 조씨는 1942년 6월 일제(日帝)에 강제로 징용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시의 한 군수공장에서 일했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이듬해 서태평양 펠렐리우섬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200여명과 함께 비행장 건설에 투입됐다.
1945년 종전 직전, 섬에 상륙한 미군과의 전투로 일본군 2만명이 전멸했다.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동자들 또한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조씨는 가까스로 동료 2명과 함께 산속으로 도망쳤다. "미군에게 붙잡히면 귀와 코, 입이 베인다"던 일본군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셋은 일본 함대가 다시 돌아와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반년이 지나도 일본군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셋 중 하나는 미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나머지 한 명도 미군에 붙잡혔다. 홀로 남은 조씨는 현지인이 키우는 작물을 훔쳐 먹거나 벌레와 새를 잡아먹으며 살아남았다.
조씨의 시계는 기원전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추우면 깡통을 갈아 만든 바늘로 포대를 기워 입었다. 미군용 성냥을 주웠을 땐 불을 처음 발견한 인류처럼 달팽이를 익혀 먹었다. 빈 병 3개에 매일 나무 조각을 넣는 식으로 날짜를 세기도 했다.
1955년 5월 조씨는 작물을 훔치다가 붙잡혀 자연인의 생활을 마감했다. 현지인 중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조씨는 미군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돌아온 조씨는 행복했을까. 고향에 두고 온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재혼한 뒤였다. 10년 간의 고된 산속 생활에서 생긴 이질 때문에 몸도 가누기 힘들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에게 남은 것은 귀국 당시 입었던 화려한 정장 한 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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