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신임 당대표로 당선됐다. 이 의원은 7선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정치 9단'이다.
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 의원은 '이인용 면장 댁 셋째 아들'로 자랐다.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형제들과 덕수중, 용산고에 진학했다.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않아 1972년 사회학과로 새로 입학했다. 재입학을 하면서 같은 당 신경민 의원과 동기가 됐다.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두 번의 옥살이를 했다. 1973년 10월 교내 유인물 사건에 관해 수배를 받았고,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내란음모 및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투옥됐다가 11개월 만에 석방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됐다가 1980년 복학해 복학생협의회장을 맡았지만 그해 다시 전두환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2년 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했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민주쟁취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6월 항쟁을 주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서울 관악을 지역에서 김종인 전 의원과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맞붙어 당선됐으며, 이곳에서 17대 국회의원까지 5번 연속 당선됐다.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등 정부에서도 요직을 지냈다.
참여정부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자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면서도 비교적 강한 권한을 가진 '책임 총리'로 일했다. 세종시 건설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 대정부질의를 하면서 야당과 언성을 높여 '버럭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총리직을 사임한 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과 합당한 대통합민주신당의 제17대 대통령 후보경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패배 이후 2008년 1월 탈당하고 제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19대 총선에선 국무총리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세정특별자치시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20대 총선까지 7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이 의원은 대통령 선거 전략에도 직접 관여해 좋은 성과를 거둔 '전략통'이기도 하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선거대책본보 부본부장을 맡아 헌정 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와 '킹 메이커'로 불렸다.
2012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의 당대표도 경험한 바 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 안철수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하고 당대표직을 사퇴했다.
△1952년 충남 청양 출생 △용산고 △서울대 사회학과 △광장서적 대표 △국무총리실 국무총리 △교육부 장관 △제13·14·15·16·17·19·20대 국회의원 △민주통합당 대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