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 27일. 텐유호가 인도네시아에서 알루미늄 3600t을 싣고 인천항을 향해 떠났다. 배에는 한국인 선장 신영주씨와 기관장 박하준씨, 그리고 중국인 12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출항 3시간 만에, 텐유호의 교신은 끊어졌다. 그 뒤로 누구도 이들을 보지 못했다.
3개월 뒤 텐유호는 뜻밖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중국의 한 항구에 입항한 텐유호는 '사네이 1호'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공안당국은 사네이 1호가 실종된 텐유호라는 첩보를 받고 조사에 나섰다. 첩보대로 사네이 1호는 텐유호와 엔진 번호뿐만 아니라 선박 제원 역시 동일했다.
그러나 선원도, 화물도 달랐다. 심하게 녹슨 선체엔 낯선 인도네시아인들이 있을 뿐이었다. 텐유호에 실려 있던 60억원 상당의 알루미늄은 온데간 데없고, 엉뚱하게도 팜유 3000t이 적재돼 있었다. 알고 보니 이 팜유 또한 1997년 실종된 다른 배에 실려 있던 화물이었다.
조사 결과 텐유호는 출항 직후 동남아시아 말라카 해협 인근에서 해적들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드러났다. 텐유호는 이후 선명이 위조된 채 3번이나 매매된 상황이었다. 단순히 선박에 있는 금품을 빼앗거나 선원을 인질로 삼아 몸값을 요구하는 것에서 나아가, 선박 자체를 탈취해 선박과 화물을 팔아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해적 행위였던 것이다.
수사기관은 이들의 납치에는 단순 해적뿐만 아니라 한국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필리핀 등 5개국에 거점을 둔 국제 범죄조직이 개입됐다고 판단했다. 한국 경찰은 관련 국가에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종결됐다. 사라진 선원 14명의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현재 이들은 동남아 해역 일대의 새로운 위협 요소로 떠올랐다. 국제해사국(IMB)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생한 해적 공격 건수 180건 중 절반이 넘는 95건이 동남아 일대에서 일어났다. 섬이 2만개에 육박해 해적들이 도주하기 쉬운 지리적 조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인근 국가들의 경제적 붕괴가 해적 급증 원인이라는 시각이 대다수다. 영화 속 모습과 달리 해적들에게 낭만 따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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