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까지는 서울 은평구 구파발에 살았고, 이후 경기도 고양시 삼송리로 이사해서 삼송초등학교를 다녔죠. 아버지 최국현이 사우디 근로자로 떠나면서 최진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를 합니다. 이후 불광초등학교-동명여중-선일여자실업고를 다녔습니다.
최진실 모친 정옥숙의 책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웅진윙스)는 2011년 5월27일에 발간됐죠. 저서에는 최진실의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7세 최진실이 자살을 시도한 일일 것입니다. 월세를 못내서 이사를 전전하던 그들이 거미줄이 널린 눅눅한 지하 연탄광에서 기거할 때였습니다. 모친이 전하는 당시 최진실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약방에 가서 쥐약 좀 주세요 그랬더니, 약사 선생님이 가만히 날 보시는거야. 그리고 좁쌀같이 생긴 걸 주셨어. 지영이네 가면서 그걸 조금씩 조금씩 먹었어. 자고나면 아침이면 죽어있겠지 하면서. 지영이네 집까지 가니까 어느새 그걸 다 먹었더라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배가 너무 아픈 거야. 쥐약을 먹었으니까 분명히 죽어 있어야 하는 건데, 안죽고 말야. 배가 너무 아파서 설사만 무지 했어. 그 약사 선생님이 나 딴 약 줬나봐. 그치 엄마?"
그는 경복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을 좋아했으며 KBS탤런트 공채시험에 합격한 1기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부친의 반대에 배우의 꿈을 접었죠. 이후 최국현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택시운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진실은 자서전에서 "아버지에겐 늘 여자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죠. 정옥숙은 결혼 이후에 최국현에게 이미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최진실에게는 이복 오빠가 둘 있습니다. 최진영의 장례 때 관을 들어준 사람들입니다. 1985년 최국현은 가출을 했고, 최국현-정옥숙 부부는 별거를 계속하다가 1998년에 정식 이혼을 합니다. 최국현씨는 자신의 존재가 딸에게 누가 될까봐 누구한테도 '최진실의 아버지'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2008년 최진실의 빈소를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것을 레이디경향 김민주 기자가 발견했습니다. 최국현이었습니다. 당시 73세. 기자는 짧은 인터뷰를 했네요. 그는 최진실의 장례 때 이런저런 일을 맡아 하고 있었는데, 특히 부검 얘기가 나왔을 때 자식을 두번 죽일 수 없다며 반대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최진실이 죽기 며칠전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때도 얼굴이 썩 좋지 않아서 내심 걱정을 하긴 했는데, 워낙 야무진 아이니까 알아서 잘 관리하겠지 라고 생각했죠. 최근 병원에 다녔던 건 알고 있었는데...어디가 아픈지는 자세히 몰랐죠.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보며 담배연기를 뿜었습니다. 부친에 대한 최진실의 심경은 착잡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성공한 이후 아버지를 찾아가 차를 한대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애증이 교차하는 대상이었겠죠.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최진실이 조성민과 이혼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그토록 고뇌하고 망설였던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를 뼛속 깊이 겪었던 터라 그 악몽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미워도 아버지였습니다. 최진실과 최진영은 생전에, 아버지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 인사를 드리곤 했죠. 그런 기억들이 불쑥 치미는지, 딸에 대해 말을 할수록 속이 아프다는 최국현은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뒤 더 이상 묻지 말라면서 인터뷰 도중 일어섰다고 하네요.
지금 83세일 최국현은, 최진실의 10주기를 어떻게 보냈을까요. 갑산공원의 가장 높은 곳인 마므레동산 묘역에, 올해도 그의 그림자가 슬쩍 다가와 딸을 향해 오열하다 갔을까요.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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