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낱말은 여편네, 계집애의 총칭(1940년 문세영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으로 의미가 변경됐다. 인식의 변화에 의한 뜻의 변화다. 이처럼 사전이 우리 시대의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간직했는지 살펴보고, 우리말 사전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전시가 처음으로 열렸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훈민정음 반포 572돌을 맞아 올해 한글날(10월 9일)을 기념하여 우리말 사전의 모든 것을 소개하는 기획특별전 '사전의 재발견'을 9월 20일부터 12월 25일까지 서울 용산 국립한글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연다.
이번 전시에서 1878년 제작된 한불사전 필사본과 서재필 박사의 영한사전 초고, 이승만 박사의 신영한사전 초고, 우리말 큰사전 원고와 그 원천인 말모이 사전 원고 등 13개 기관이 소장중인 총 122건 211점이 소개됐다.
전시는 140여 년간의 사전 역사를 시대별로 소개하는 '1부 우리말 사전의 탄생'과 사전에 담긴 일상어를 비롯해 전문어, 신어, 옛말, 속담, 사투리 등을 살펴보는 '2부 우리말 사전의 비밀'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는 올해 국립한글박물관이 기획한 네 번째 전시이고, 그중에 가장 한글박물관다운 전시이다.
박영국 국립한글박물관 관장은 "그동안 사전을 모은 전시회가 한 번도 없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인 사전의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조망하는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며 "한글박물관이 아니면 못하는 그런 전시를 '사전의 재발견'에서 구현했다"고 강조했다.
▶1부, 우리말 사전의 탄생
지난 140여 년간 우리말 사전의 발자취를 한자리에 모아 소개한다.
'한불사전 필사본'은 1878년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만들었으며, 1880년 인쇄된 '한불사전'의 원형이 된다. 당시에는 필사본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조판했다.
'한불사전 필사본'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하는 것으로 전시를 통해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됐다.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1890년 만든 '한영자전'도 전시됐다. 이 사전은 외국인 선교사가 선교할 때 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소형 사전이다.
최초의 대형 사전인 '노한사전'은 한글 사전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러시아어는 활자로 인쇄하고 한국어는 활자가 없어 필사했다.
이 사전은 한글의 뜻풀이가 자세하고 함경도 지방의 방언을 포함하고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1895년 우리나라 사람이 최초로 만든 한국어-한문 대역사전인 '국한회어'도 흥미롭다.
이 책은 가로쓰기로 돼 있고 가나다순으로 단어가 배열돼 현대 사전에 거의 가까운 첫 사전이다. 조선시대 어휘집에서 현대사전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모양이다.
서재필 박사의 '영한사전 초고'와 이승만 박사의 '신영한사전 초고'는 사전으로 발간되지 못했지만, 사전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A에서 P까지 794장의 낱장으로 구성된 '영한사전 초고'는 내용이 체계적이고 품사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A~F까지 원고가 집필된 '신영한사전 초고'는 미국 웹스터 영영사전 등을 참고하여 작성됐다.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를 위해 1911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1920년에 발간된 '조선어사전'은 일본의 관리나 경찰 등이 조선의 옛 문헌을 해독하여 우리 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에 쓰이던 신문물과 관련한 새로운 낱말들은 실리지 않았다.
우리말 사전의 기틀이 된 '말모이 사전 원고'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 김두봉 권덕규 등을 중심으로 말과 글을 닦아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시작됐다.
서전 출간을 앞두고 1914년 주시경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모이'는 결국 출간되지 못했지만, 원고는 애국계몽단체 계명구락부와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사전 편찬사업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우리말 학습 사전인 '보통학교 조선어사전'도 전시됐다. 심의린이 저술한 것으로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조선어 독본'의 낱말을 사전에 실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약 2천 개의 올림말이 실려 있다.
표준어가 도입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이후 첫 사전은 '조선어사전(1938)'이다.
당시 배재고 교사였던 문세용은 배우고 쓰기에 쉬운 국문은 있으나 말의 길잡이가 되고 글을 닦는데 가장 요긴한 사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0여 년간 낱말을 모아 '조선어사전'을 편찬했다.
'조선어사전' 이후 다양한 편집사전이 출간됐다. 일부 고유어만 빼서 만들기도 하고, 삽화를 넣어서 새로 편집하기도 했다.
국가지정문화재 '우리말 큰사전 편찬 원고'도 전시됐다.
조선어학회에서 1929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작성한 사전 원고의 최종 수정본으로 전체 17책 중의 5책은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남은 12책 중의 3책이 이번에 전시됐다.
원고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에 일제로부터 되찾아 만든 것으로 수정·교열한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말 큰사전 원고'은 1957년에 총 6권의 '큰사전'으로 출간됐다.
전시장에는 '말모이'부터 '큰사전'까지 편찬 역사를 영상으로 엮어 관람할 수 있게 해 놨다.
영상 마지막 부분에는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우리 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 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라는 '큰사전' 말머리가 소개됐다.
▶2부, 우리말 사전의 비밀
2부에서는 시대별 사전의 낱말 뜻풀이가 우리 시대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우리 인식 변화를 담고 있는지 살펴본다.
전자사전은 판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제일 최신 버전만 나와 있지만 종이 사전의 경우 판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어서 시대별로 단어가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 수 있다.
인식의 변화가 있는 주요 낱말 중의 하나는 사회적 약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전시장에는 1940년 '문세영 수정증보 조선어사전'과 1957년 '한글학회 큰사전',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를 비교 분석한 작품을 설치했다.
'계집'이라는 단어는 '부녀를 낮춰 일컫는 말(1940)' 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1957)',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1999)'로 변했다.
'여자'의 경우는 '여편네 계집애의 총칭(1940)' 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1999)'으로 의미가 변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우 1940년 사전에서는 소경, 장님, 벙어리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오고 1989년 장애인복지법이 만들어 지면서 장애인으로 통일되고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한 시대에 풍미했던 유행과 관련된 낱말들도 연대별로 정리돼 있다.
1920~30년대 현대여자 일컫는 '모던껄'과 현대청년을 말하는 '모던보이'가 유행했고, 전쟁 이후 1950년대에는 '춤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이와 관련한 영상물로는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트위스트 김이 춤추는 장면을 영상으로 전시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군부독재에 대항해서 저항과 자유의 상징인 '초미니'와 '장발족'이 유행했다.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를 자르는 영상과 치마 길이를 자로 재서 단속하는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됐다.
1990년대에는 경제가 성장하고 대중문화가 발전하면서 '신세대'와 'X세대'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그것을 능숙하게 다루는 세대를 'Y세대'라고 했고,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정보에 능동적인 사람을 'N세대'라고 불렀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자동차, 전화, 전기 같은 새로운 낱말이 사전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시장에는 이런 낱말들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계단 모양으로 시대순으로 나타난 단어들을 배열했다.
'삶의 깨우침, 속담' 코너에서는 '끈 떨어진 망석중', '개방귀 같다', '동방삭이 밤까먹듯' 등의 속담들을 카드에 적어 전시했다.
관람객들은 속담카드를 하나씩 빼서 카드 뒷면에 있는 속담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말도 소개돼 있다. 옛말 중에 '열두 띠 동물론 본 옛말'을 풀어 놨다. '뱀'은 '배암'이라고 불렸고, '용'은 '미르'라고 불렸다.
'스포츠 경기로 보는 남북한 우리말' 코너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스포츠 경기를 재편집해서 어떻게 북한에서 스포츠 경기 낱말을 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골키퍼를 '문지기', 수비수를 '방어수', 핸들링을 '손다치기', 헤딩을 '머리 받기' 등으로 사용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는 사전 편찬에 관여한 출판사 관계자, 작가, 연구진 등 다양한 입장에서 사전이 무엇인지를 대답하는 영상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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