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절량농가’도, ‘보릿고개’도 없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면서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다. 한 인기가수가 부른 유행가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최근 ‘보릿고개’가 다시 미디어에 등장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3분기 실적 발표가 계기가 됐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지난달 말 3분기 경영실적을 발표했다. 현대차는 매출과 차량 판매 등에 큰 변동이 없었지만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76%나 급감했다. 경상이익 및 순이익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67.1%, 67.4% 떨어졌다. ‘어닝쇼크’다.
위기라기보다는 일시적 ‘보릿고개’인 것 같다. ‘보릿고개’는 식량 조달의 미스매치로 빚어진다. 6월 보리 수확철로 접어들면 ‘절량농가’는 사라진다. 현대차그룹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3분기 실적 발표 전부터 이를 감지하고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을 중심으로 대처에 나선 상태다.
‘호모부가(毫毛斧柯)’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안 좋은 수목은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는 도끼를 사용하는 노력까지 필요하게 된다는 뜻이다. 화근은 기미가 보일 때 예방에 나서야 된다는 얘기다. 주(周)나라부터 통일 진(秦)나라에 이르기까지 전략가들의 변론과 책모를 엮은 ‘전국책(戰國策)’의 위책(魏策)편에서 유래한다. 합종연횡설로 유명한 소진(蘇秦)이 위(魏)나라 양왕(襄王)에게 위나라의 국력이 작지 않은데 강국 진나라와 연합하면 속국밖에 되지 않으니 주변 6국이 힘을 합치는 합종전략으로 맞서자는 설득 논리에서 등장한다.
사마천 사기(史記)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편에서 기록된 ‘견미지저(見微知著)’라는 고사도 지금 현대차그룹은 새겨들을 만하다. ‘사소한 것을 보고 장차 드러날 것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다. 사전 대비나 예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현대차그룹도 철저한 대비로 일이 그릇된 뒤 후회한 ‘서제막급(噬臍莫及)’의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등(鄧)나라 왕 기후(祁侯)의 신하가 앞날을 예측하고 간언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엎질러진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후회 전에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조카인 초나라 문왕의 손에 멸망한 등나라 왕 기후의 뒤늦은 후회와 어리석음을 현대차그룹이 모를 리 없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최근 그룹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오히려 자신의 위기관리 리더십을 재계에 떨쳐보일 기회다. 예전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회장이 됐을 때와 묘하게 겹친다. 정몽구 회장은 IMF 외환위기 직후였던 어려운 시기에 취임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 현대차그룹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정 수석부회장은 불확실성이 높은 위기 국면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인 듯하다. 상품 경쟁력 및 판매 역량 제고, 신기술 개발 등 ‘정공법’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현대차는 마진이 높은 SUV, 고급차를 중심으로 라인업을 확장하고 상품 경쟁력을 끌어올리려 한다. 미국 시장에는 신형 싼타페와 투싼 개조차를 투입하고, 중국에는 성수기인 4분기 판매에 역량을 쏟을 계획이다. 가성비 높은 고급차종인 EQ900, G70 등 제네시스가 미국 등에 빠르게 투입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다르지 않다. 기아차는 전략 차종이 달라도 대책은 대동소이하다.
현대차그룹 내에서는 3분기에 일시적 비용을 반영하면서 수익이 큰 폭으로 하락했으나 4분기부터는 수익이 반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차종 판매 확대가 제대로 이뤄지고 내년 스마트스트림, 3세대 플랫폼, 신규 디자인 적용 신차 판매 등도 본격화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 이익창출 능력이 극대화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보릿고개’는 당시 ‘개떡’이라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을 탄생시켰다. 유난히 맛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떡’자 앞에 ‘개’자를 붙였을까. ‘개’라는 접두사는 ‘제대로 안 된', '사이비의', '흉내 낸', '문제있는’ 등 부정적인 의미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젊은 층에서 ‘개’의 용례가 확대돼 ‘지나치게', '엄청나게’ 등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뜻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겪는 이른바 ‘보릿고개’의 해피엔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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