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이 있었다고 해도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9일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4명과 유족 1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1억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피해자인 양 할머니 등은 1944년 5월 일본인 교장의 회유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돼 임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중노동을 했다. 이에 대해 1999년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피해자들은 2000년 국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은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모두 패소 판결했다.
같은날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도 박 모 할아버지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6명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피해자 박 할아버지 등은 1944년 8~10월 강제징용돼 일본 히로시마 구 미쓰비시중공업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서 중노동을 했다. 이후 미쓰비시중공업 측에 강제징용에 따른 손해배상금과 강제노동기간 동안 지급받지 못한 임금 1억100만원을 지급하라며 양 할머니 등과 별도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사건의 주요 쟁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맺어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 여부였다. 앞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선고된 일본 도쿄의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사건과 동일한 지점이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이날 대법원 역시 "원고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이라면서 "원고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 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고가 이 사건에서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원고에 대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며,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롯 허용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최종 선고가 나오자 피해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피해자인 김성주 할머니는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와보지도 못하고 일본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로 세월을 보냈는지 말도 못한다"면서 "소송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에 다녀온 뒤로는 남편한테 위안부라는 소리를 듣고 매를 맞고 살았다. 너무 억울한 세월을 보냈고, 살아온 평생이 한스럽다"면서 "이제 미쓰비시가 사죄하고 배상할 일만 남았다"고 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2000년 법원에 첫 소송을 제기한 후 18년 6개월만에 상식이 통하는 판결이 나왔다"면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오랜시간 일본 전범기업과 한국사회의 편견 속에서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냉전시대의 정치적 산물인 한일협정에 기대지 말고, 피해자 인권을 존중하는 국제인권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미쓰비시 역시 국제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서 한국 피해자들에게 사과는 물론, 종합적인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신일철주금에 이어 미쓰비시의 배상책임까지 인정하면서 한·일 외교관계는 악화할 전망이다.
대법원 판결 직후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담화를 통해 “매우 유감이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명백히 반(反)하고, 일본 기업에 대해 부당한 불이익을 주는 것이자,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구축해 온 양국의 우호 협력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뒤집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의 판결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이상갑 변호사는 "통상적으로 피고가 재판결과를 이행하는 것과 달리 이 사건은 미쓰비시나 일본 정부 모두 한국 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길게는 70년 이상 이어온 싸움에서 더는 피해자들이 맨손 맨발로 해결하는 상황이 되지 않도록 외교부가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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