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시킨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지 40년이 된 올해 경제 성장의 주역인 민영기업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국진민퇴(國進民退⋅국유기업 전진 민영기업 후퇴)' 논란에 따른 내우(內憂)에 무역전쟁이라는 외환(外患)까지 덮친 탓이다.
중국 공산당 및 정부가 개혁·개방 40주년을 자축하느라 여념이 없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의기소침해질 법도 한 상황이지만 중국 기업인들은 오히려 "고난을 이겨내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무역전쟁 등으로) 경영 여건이 안 좋을 때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지난달 26~29일 중국 제조업의 전진기지로 불리는 광둥성 포산·장먼·주하이·허산 등의 도시를 돌며 민영기업의 현주소를 탐문하고 미래를 조망해 봤다.
◆개혁·개방 바람에 여기까지 왔지만···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에 내린 뒤 차로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포산시. 현지 주민들의 자부심이 상당했다.
황비홍(黃飛鴻)과 엽문(葉問) 등이 태어난 중국 무술의 본향이자 청말 학자이자 정치가로 변법자강 운동을 주도한 캉유웨이(康有爲)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 철도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유학파 엔지니어 잔톈유(詹天佑)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과거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포산의 제조업 DNA와 기술 역량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부연한다.
상주인구 766만명인 포산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9551억 위안으로 중국 내 16위다. 도시 경쟁력은 11위를 기록했다.
공업생산 규모는 1조5000억 위안으로 중국 내 6위, 광둥성에서는 선전에 이은 2위다. 황비홍의 고향보다는 중국을 대표하는 산업 도시로 부르는 게 합당하다.
차이자화(蔡家華) 포산시 상무부시장은 "포산은 민영경제 위주의 도시"라며 "전체 기업 수와 공업생산에서 민영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90.4%와 7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차이 부시장은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수많은 기업가들이 제조업에 투신했다"며 "1970년대 농촌의 소규모 향진기업이었던 메이디(美的)가 중국을 대표하는 가전업체이자 포천 500대 기업으로 성공한 게 대표적 사례"라고 소개했다.
그 말처럼 포산을 비롯한 광둥성 내 다수의 도시에서는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성공한 기업가로 변신한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중국 5대 에어컨 제조업체로 꼽히는 즈가오(志高)그룹의 리싱하오(李興浩) 회장도 그중 한 명이다.
1994년 창업한 이 회장은 사반세기 만에 매출 107억 위안(약 1조7300억원)의 중견기업 오너가 됐다.
리 회장은 "현재 45% 수준인 수출 비중을 점진적으로 높여 나갈 것"이라며 "중국 에어컨 시장에서 1위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음료수용 페트병 금형을 주력으로 생산하는 싱롄(星聯)의 장샤오핑(姜曉平) 회장은 리 회장보다 1년 앞선 1993년 창업했다.
초창기 직원 몇명과 음료수병 뚜껑을 만들어 팔던 장 회장은 1998년 코카콜라를 고객사로 유치하면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중국과 일본 시장 점유율이 각각 60%와 50%에 달하는 싱롄은 해당 업종에서 아시아 1위 기업으로 통한다. 독일과 캐나다 기업과 글로벌 시장을 놓고 다투는 중이다.
장 회장은 "국내에는 적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미국과 유럽, 동남아 등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해 수출 비중을 과반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기업가들 입장에서 올해 유독 세간에 회자됐던 국진민퇴 논란은 꽤나 불편하다.
한 정치 평론가가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인터넷에 올린 "공유경제 발전을 돕는 사영경제(민영경제)의 임무는 끝났다. 이제 경기장을 떠나야 할 때"라는 글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비슷한 시기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창 달궈진 국진민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경영난에 처한 민영기업을 국유기업이 사들이고, 대부분의 기업에 공산당 조직을 설치토록 하는 정책이 발표되는 등 흉흉한 상황이 지속되는 중이다.
급기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민영기업은 우리 사람"이라며 직접 진화에 나서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민영기업의 기를 죽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광둥성에서 만난 기업가들은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공도 없었다", "공산당의 지원에 감사한다", "정치 문제는 기업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등을 얘기했지만 목소리 너머의 불안감이 감지됐다.
◆믿을 건 실력뿐, 제조역량 강화 박차
정부가 민영기업 지원 확대를 공언했지만 전체 기업 대출의 75% 이상이 국유기업을 상대로 집행되는 등 차별은 여전하다.
결국 자력갱생이 답이라는 게 중국 민영기업을 이끄는 이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즈가오그룹은 2012년 스마트 클라우드 에어컨을 출시한 데 이어 올해 음이온 발생을 극대화한 에어컨 신제품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리 회장은 "고급 인재 유치와 연구개발(R&D) 역량 제고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며 "일본 등 제조업 선진국을 반드시 따라잡겠다"고 강조했다.
싱롄은 2016년 5억 위안(약 809억원)을 들여 신공장을 준공했다. 한 대에 800만 위안 정도 하는 제조설비도 대부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시제품을 만드는 데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하는 등 신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싱롄 관계자는 "전체 직원 400명 중 3분의1 이상인 150명 정도가 R&D 인력"이라며 "코카콜라와 네슬레 등 글로벌 기업을 상대하려면 프리미엄 제품 제조 역량이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선전에 본사를 둔 전장용 커넥터(접속기) 제조업체인 더룬(得潤)전자는 올해 허산시에 신공장 문을 열면서 자체 개발한 자동화 설비를 들여놨다.
기존에 30명이 하던 일을 6~7명이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인건비도 기존 대비 15%가량 절감했다.
현재 가동 중인 신공장 1기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1500명, 목표인 3기 준공까지 끝나면 9000명 수준으로 늘어난다. 더룬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50억 위안이었던 매출이 내년에는 70억 위안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둥성 제조업 선진화를 상징하는 곳은 중국 국유기업인 제일자동차와 독일 폭스바겐의 합작 법인인 이치다중(一汽大衆) 포산공장이다.
국유기업이 모태지만 폭스바겐의 기술력을 받아들여 글로벌 수준의 첨단 자동차 생산라인을 갖췄다.
2012년 준공한 1기 공장에 이어 지난 6월 2기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연간 생산량이 60만대로 증가했다. 내년 목표는 연산 77만대, 전기차 공장도 새로 가동될 예정이다.
설비 자동화율은 1기 공장이 70%, 2기 공장은 80% 수준이다. 프레스와 도장 공정의 자동화율은 100%에 달한다. 2기 공장에만 949대의 산업용 로봇이 설치돼 있다.
탕자텅(唐嘉彤) 이치다중 포산공장 매니저는 "아우디 A3와 골프 등 4개 차종을 생산 중"이라며 "1분에 1대씩 하루에 1200대가 생산된다"고 설명했다.
◆무역전쟁은 위기, 강주아오 대교는 기회
미·중 무역전쟁은 최근 들어 중국 경제에 닥친 가장 큰 위기다.
시 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무역전쟁의 잠정적 휴전에 합의했다.
기존 관세율 인상 및 추가 관세 부과를 미루고 향후 90일 동안 무역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다만 무역전쟁 종전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중국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수준이지만, 광둥성의 경우 45%를 웃돈다. 무역 마찰이 격화돼 글로벌 경제가 위축되면 타격이 불가피한 구조다.
역내 기업들의 위기감도 클 수밖에 없다. 즈가오그룹의 리 회장은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 (무역전쟁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공생을 위한 길을 찾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즈가오 에어컨의 해외 매출은 43억 위안으로 전년보다 9.7% 증가했다. 미국 매출은 무려 50.1% 급증했다. 미·중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당장 올해부터 매출 감소가 예견된다.
포산의 산업용 로봇 솔루션 제공업체인 리쉰다(利迅達)는 올 들어 주문량이 40% 줄어들었다.
오포·비보 등 중국 스마트론 제조 브랜드가 주요 고객사인데 무역전쟁으로 내수 소비가 줄어든 게 주문량 감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리하이나(李海娜) 더룬전자 허산법인 총경리는 "미국보다 유럽 수출 비중이 크지만 무역전쟁의 영향이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토로했다.
무역전쟁의 충격을 상쇄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 10월 강주아오(港珠澳) 대교가 공식 개통한 것은 광둥성 소재 기업들 입장에서 호재다.
다리 이름에서 드러나듯 홍콩과 광둥성(주하이), 마카오를 잇는 전체 길이 55㎞의 해상 대교다. 해상 구간은 29.6㎞로 교량 구간이 23㎞, 나머지는 해저터널 구간이다.
중국은 강주아오 대교가 '세계 최장의 해상 대교'라고 주장한다.
다리가 지나는 주하이는 물론 포산과 장먼, 허산 등 인근 도시를 잇는 광역 경제권 탄생이 기대된다.
실제 강주아오 대교 건설은 홍콩과 마카오, 광둥성 내 9개 도시를 하나로 묶는 대만구(大灣區) 전략을 상징하는 역사(役事)이기도 하다.
차이 부시장은 "대만구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조 기지를 구축하는 사업"이라며 "강주아오 대교 개통으로 광둥성이 홍콩·마카오와 생산요소 및 혁신요소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