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인 돈이 풀렸다면, 돈값이 떨어져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져야 하는데 중앙은행들은 목표치를 훌쩍 밑도는 물가지표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경기 회복세로 물가가 오를 것 같으면 소비가 늘어 경기에 더 힘이 실리는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오히려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될 정도다.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소비·투자 위축에 따른 경기불황을 초래한다.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하는 장기침체를 겪은 일본은 디플레이션의 대명사로 통한다. 1990년대 초 디플레이션 수렁에 빠진 일본 경제는 온갖 통화·재정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상궤도를 되찾지 못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곧 '디플레이션 20년'으로, 사실상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 말 거품(버블)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지만, 붕괴 가능성을 우려한 이는 별로 없었다.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한없이 오를 듯했다. 일본 은행들은 대출에 너그러웠고, '플라자합의'에 따른 엔고(엔화 가치 상승) 기대감이 외국에서 투기자금을 끌어와 자산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그 사이 일본 기업들은 미국 기업과 랜드마크 부동산을 사들이며 해외사업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1968년 독일(당시 서독)을 제치고 미국 다음 가는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지만, 장기불황 끝에 2010년 이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이때부터 지난해까지 8년 동안 일본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0.9배로 쪼그라들었다. 반면 미국은 1.3배, 중국은 2배, 독일·영국은 1.1배로 GDP를 키웠다. 세계 5위권에서 일본만 역성장한 셈이다. 일본 경제가 불황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소니, 샤프, 파나소닉 등 한때 일본 위협론을 주도하던 간판기업들도 뒤안길로 밀려났다.
일본은행(BOJ)은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실험적인 통화정책을 총동원했다. 1991~92년 자산거품이 터지자 6%에 달했던 기준금리를 연거푸 낮췄다. 1998년 9월 금리가 0.25%로 한계치에 이르자, 이듬해 2월 사상 유례없는 제로(0)금리 시대를 열었다. 10년 만기 일본 국채 금리가 3개월 새 2배로 뛰고,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불과 반년 만에 8년 저점에서 20% 넘게 치솟았을 때다.
BOJ는 제로금리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2년 뒤에는 '양적완화(일본에선 금융완화)' 프로그램을 도입한다. 필요 이상의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또 하나의 유례없는 통화부양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럼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말 집권하며 '디플레이션 탈출'을 공약으로 내걸어야 했다.
BOJ는 이후 자산매입 대상과 규모를 확대하는 2차원 금융완화와 마이너스 금리 도입 등 미지의 통화정책 실험을 계속했지만, 2013년 마이너스였던 물가성장률을 2년 안에 2%로 높인다는 목표를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0.7%(5월 기준, 전년대비)에 불과하다. 2016년 한때는 다시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초저금리 환경 속에 줄어든 GDP를 부채로 메웠다. 이 결과 GDP 대비 부채 비율이 253%(2017년 기준)로 세계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아졌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경험은 비슷한 위기에 처한 세계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전문가들은 주요국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미 통화·재정 부양 수위를 한껏 높인 터라 추가 대응 여지가 크지 않아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부가 마구 돈을 찍어 재정지출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이단의 경제학', 이른바 '현대화폐이론(MMT)'이 최근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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