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에세이 '한낮의 우울(The Noonday Demon, 2001)'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에는 미친 듯한 사랑이 찾아오듯 미친 듯한 절망이 찾아오기도 한다. 후자가 바로 우울이라는 얘기다. 작가 앤드루 솔로몬(Andrew Solomon·1963~)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남자로, 명문 예일대를 졸업해 신예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악마(우울증을 그는 그렇게 불렀다)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고 극심한 무기력감과 불안감이 닥쳤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몸을 옆으로 눕힐 수도 없을 정도였다. 샤워도 불가능했다. 운전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법조차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외출 중에 옷에다 대변을 보는 일도 생겼다.
그들은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정신과 의사들은 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자살 시도 후 생존한 이들에게 당시의 생각을 물어보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고 한다. "자살 생각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기에 정상적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어요. 죽음을 명령하는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성적 사고가 순간적으로 마비되어 버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것이 선택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지난달 24일 통계청은 2018년 한국의 자살자 수가 1만3670명으로 전년보다 9.7% 늘어났다고 밝혔다. OECD 36개국 가운데 자살률이 1위였다. 특히 10대 자살률이 가장 많이 늘어났고(22.1%), 20대 사망의 절반가량(47.7%)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은 큰 충격을 줬다. 통계청에서는 이런 기록에 대해 그해 상반기에 유명인 자살이 집중되면서 생긴 베르테르 효과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가능성'일 순 있지만, 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분석하는 일은 정부의 인식을 의심스럽게 한다.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제안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다. "물질적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정신적 문제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럽과 미국의 경우 경제공황이나 정치적 위기로 혼란스럽거나 고통스러운 시대에는 자살률이 높지 않았다. 반대로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고 복지제도가 갖춰질수록 자살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후 60여년 만에 선진국 문턱에 선 나라.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산업화와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진 대한민국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례없이 중증의 '우울사회 증후군'에 시달리는 나라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생존 자체의 걱정이 사라질수록 사람들은 불안과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 프랭클의 문제의식이다. 존재론적인 공허가 엄습하면서 '의미있는 삶'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자살률은 거리의 유령처럼 고개를 든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은 한국에서 우울증 환자의 숫자가 급증한 것이 2000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겼을 때이다. 21세기 인류의 최대질병 3가지 중 하나로 우울증을 꼽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임상(臨床)국가'로 볼 만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지적도 있다.
왜 하필 우리나라인가. 우리나라는 급속한 사회변화와 경제력 향상을 경험하면서 '우울증'을 조장하는 병적 생태계가 함께 형성되어 왔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빈곤층의 확대, 상대적 박탈감과 치열한 경쟁 탈락의 스트레스, 청년 실업과 고령화에 따른 노인빈곤, 전후 이념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사회갈등으로 깊이 내재된 상황, 최근의 경제 불황, 사회 변동에 따른 남녀·세대 간의 적개심, 인터넷 강국의 그림자인 사이버테러와 들끓는 여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희망이나 배려와 같은 긍정적 가치들이 도태되고 물신주의와 외형 중시의 '피상적 가치'에만 몰두하는 사회적 공기, 적개심과 분노를 용기나 지혜와 혼동하는 분위기, 이런 것들이 우울사회의 핵심적 병인(病因)으로 지적된다.
솔로몬이 극한의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비슷한 환자들과 생활하면서였다. 자신의 상황을 먼저 고백하고, 서로의 고통을 소통하고 공감함으로써 어떤 힘이 생겼다. 솔로몬은 우울증을 공론화하면서 책으로 펴냈다. 그는 우울증이 '지체장애'와 같은 어떤 핸디캡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울증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입니다. 이제 저는 슬픈 날에도 활력을 느낍니다." 솔로몬의 말은 이 나라에도 화두를 던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우울사회를 떨쳐낼 삶의 활력이다. 우리 사회는 자살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의 절망적 행동으로 자주 받아들여 왔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 속에는 자살자의 행위에 대한 훈계성 비판이 숨어 있는 게 사실이다.
설리(최진리)의 죽음은 다시 '우울사회' '자살률 1위'의 한국을 돌아보게 한다. 돌연한 죽음 뒤에는 어김없이 '인터넷 댓글 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가 등장하고 그에게 따라다녔던 우울증에 대한 스토리들이 등장하면서 개인적 사연들이 비춰지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그 너머에 주목해야 할 것은 스물 다섯 그녀를 앗아간 우리 주변의 '우울 생태계'이다. 돌아봐야 할 것은 정신적 가치의 불모와 포용과 배려 없는 사회가 자아내는 대한민국 전반의 '우울지수(指數)'다. 그는 한 외신의 표현대로,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파이터로 살았던 아티스트다. 그 튀는 것을 품지 못했던 이 사회가 그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안겨준 우울이었다.
설리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뿐이다. 사회의 공동책임을 떠올려야 할 대목에서 '초인적인 멘털'을 유지하지 못한 개인 선택으로만 돌리는 것은 비겁하다. 다시 한 여배우의 비극 아래서 물기 없는 눈물들이 댓글로 꿰어지고 있는 날, 정부 당국자들은 '베르테르 효과' 를 고민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바란다.
(# 이 대목은, 15일자 '정신의학신문'에 실린 나종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칼럼에서 부분 인용했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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