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없이 살 사람'은 없다. 착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법이 필요하다. 무법사회는 이상향이거나 종말론적 세상, 둘 중의 하나다. 법의 마지막 종착역은 법원이다. 재판정에서 판사는 법을 어긴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고, 돈 문제로 다투는 이들에게는 공정분배를 결정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에게 법원과 판사는 너무나 높은 곳, 특별한 사람들이다. <아주경제신문> 기자들이 스케치한 2019년 11월 대한민국 법원과 판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편집자 주]
대한민국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평범한 사회초년생들이 법원을 드나들 일은 많지 않다. 중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법원을 한 번도 찾아갈 일이 없던 20대 후반, 언론사 입사 6개월차 사회부 막내기자 3명이 서울시내 법원을 돌며 재판을 방청하며 판사들을 관찰했다. 언론의 관심을 끌 만한 큰 재판이 아닌 평범한 일반 서민들이 참석한 재판이 대부분이었다. 점심 후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거나, 피고인에게 짜증을 내며 호통을 치는 판사도 있었고, 판결문을 '속사포 랩'처럼 쏟아낸 이도 목격했다. 반면 법정에 선 이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판사도 적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30대 남성이 긴장된 표정으로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 재판은 대등재판부로, 재판장은 방청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앉은 판사였다.
대등재판부는 판결의 최종 권한과 책임을 가진 부장판사와 그 밑에서 부장판사를 돕는 배석판사 간 실질적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만들어진 대안이다. 즉 대등재판부는 판사의 '위 아래' 없는 재판부로, 재판석에는 (부장판사와 배석판사가 아닌) 법조경력 15년 이상의 부장판사 3명이 나란히 앉는다. 기존에는 법정 내 재판장 좌석이 '법대의 중앙'이었지만 대등재판부에서는 좌우좌석 모두 재판장이 될 수 있다.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 남성은 피고인석에 서서 판사의 말에 집중했다. 판사는 선고를 하기 전 양형이유에 대해 설명했고, 이 남성은 판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방청석에서는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판사의 말을 수시로 노트에 적는 모습도 보였다. 판사가 10분가량 양형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이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라는 판사의 말과 동시에 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밝은 얼굴로 남성과 눈인사를 한 뒤 재판정을 뛰어나갔다.
이 재판이 이뤄지는 동안 옆자리 A 판사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A 판사는 이 사건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는 동안 못내 피곤했던지 안경을 벗어놓고 눈을 만지는가하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의자에 기대어 5분가량 눈을 감고 짧은 잠을 자기도 했다.
재판을 방청하던 몇몇 학생들은 판사가 졸기 시작하자 노트에 이를 적으며 작은 소리로 웃기도 했다.
◇ '래퍼' '속삭임'... 법정 곳곳에선 "어떻게 알아듣나" 불평도
지난달 30일 서울남부지법에서는 업무방해 혐의로 넘겨진 이석채 전 KT 회장의 1심 선고가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판사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과 남이 들은 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사람들은 재판이 끝난 직후 방호원에게 선고를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선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남아있던 사람들은 다음 재판이 있다는 말에 법정을 빠져나오면서 "보청기를 사야되나"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한 형사단독 판사는 판결문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읽었다. 선고문을 읽으며 이 판사는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의 생일, 인적사항부터 판결 이유 등을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방청석에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듣는지 모르겠다며 판사가 '래퍼' 같다는 말도 나왔다.
◇"피고는 지금 재판의 심각성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형사재판. 음주운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피고인의 태도가 못마땅했던 판사는 "재판의 심각성을 이해 못하느냐"고 고함을 쳤다.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피고인의 자세가 판사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판사의 목소리가 커지자 법정의 분위기는 금세 싸늘해졌다. 피고인은 물론 방청객들도 급히 자세를 고쳐 앉기 바빴다. 하지만 이날 판사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오늘 선고 안합니다"라는 싸늘한 한마디에 피고인은 벌게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여전히 많은 법정에서는 판사의 짜증과 신경질, 고성이 들려왔다.
조금만 길게 설명한다 싶으면 어김없이 말을 자르는 것은 물론이고, 판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당사자 탓으로 돌리며 신경질을 부리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앞 사건에서 높아진 판사의 언성 때문에 그 다음 사건 당사자들까지 잔뜩 주눅이 들어 입 한번 제대로 떼보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비교적 상황이 낫다는 서울중앙지법은 물론 서울시내 동서남북 지법 어디서나 '판사님의 짜증'을 만날 수 있었다. 단독 판사나 소액사건일수록 판사들의 거친 언행을 목격하기 쉬웠고, 오후로 갈 수록 빈도수가 높았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한 해 민사·형사 소송사건 1심 사건 수는 137만7105건에 달한다. 이 가운데 95%가 단독판사들이 맡은 사건이다. 15년 이상의 법조경력을 갖춘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참여하는 합의부 재판은 5%에도 못 미치는 6만4313여건에 불과하다.
판사들의 언행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법원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방청을 하고 있는 기자에게 "재판이 다 끝나가는데 왜 왔냐" "출입기자단에 등록은 돼 있냐" "여기는 쓸 만한 기사가 없다"며 기어코 기자를 내보내려 했던 판사도 있었다.
법원 자체적으로 설문조사도 벌이고 있다. 법정을 출입하는 민사 및 형사사건 당사자들이 대상이다. 설문지에는 △재판부가 화를 내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재판했나 △충분한 변론기회가 주어졌나 △자신의 의사가 재판부에 전달됐나 등의 설문 내용이 담겨있다.
수거는 한 달에 한번씩 이루어지고, 해당 재판부가 명시돼 있으면 바로 전달이 된다. 재판부가 안 적혀 있으면 각 법원 공보판사에게 전달된다.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가 미처 못봤던 것들이나 무의식 중에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설문 내용은 재판 개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원 관계자도 "(설문 결과에 관한) 데이터는 따로 만들지 않아서 없고, 이로 인한 개선점도 없었다"고 밝혔다.
설문은 하고 있는데, 결과를 따로 집계하지 않으니 실태를 알 수도 없고 개선점도 나오지 않는 셈이다.
◇"다치신 곳은 없나요"... 친절한 판사
지난달 30일 서부지법의 한 법정에서는 업무집행 방해죄로 기소된, 탈북자 출신 한 남성의 재판이 있었다.
이 남성은 탈북 당시 받았던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탈북민으로 구직이 어려운 남성은 현재 지방을 전전하며 택배 상하차 업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남성은 고된 일을 마치고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이후 남성이 취해 문제를 일으키자 경찰이 출동해 남성을 제지했고, 이 과정에 남성은 우발적으로 경찰을 때렸다.
판사는 남성의 혐의를 확인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남성에게 질문했다. "가족은 어디에 있나", "정착해서 일하는 건 어렵지 않나" 등의 질문을 던졌고, 이내 남성은 반성하며 선처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 판사는 다른 피고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따뜻한 질문을 건넸다. 폭행 혐의로 기소된 한 남성에게는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 "다친 곳은 없냐"며 질문을 하기도 했다.
판사들의 친절한 모습은 다른 법원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절도미수 혐의로 넘겨진 98년생 지적장애인의 재판에서 판사는 재판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지 여러 차례 부드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특히 이 경우 치료 감호소로 가게 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어 판사는 "괜찮냐"며 피고인과 그의 부모에게도 여러 차례 되물었다. 판사는 피고인의 모친에게 "사실상 감옥 같은 곳인데, 아들이 몇 년을 가게 되는 거다"라며 재판 과정과 이후 절차에 관해 몇번씩 자세히 설명했다.
재판이 끝난 직후 퇴정하기 전 자료를 챙기고 있는 판사를 향해 "재판을 굉장히 차분하게 진행하신다"라는 말을 건네자, 한 판사는 "오늘은 언성 높일 일이 없고, 가끔은 저도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판을 받고 나온 한 사람은 '재판 어땠나'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위압적이거나 무리하지도 않고, 우리가 전에 생각했던 법원 같지 않게 편안하게 재판을 진행한다"며 "어려운 용어도 꼭 써야하지 않으면 쉽게 설명해줬다"고 밝혔다.
◇"법원이 아닌 것 같아요"... '동남북서' 법원 풍경
법조계에서는 방위를 표현할 때 동서남북이 아닌 '동남북서'라고 한다. 이를 두고 법원이 만들어진 순서로 말한다는 설, 중요도로 순서를 정했다는 설들도 나온다.
서초동에 있는 서울중앙지법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길을 헤매기 일쑤다, 특히 중앙지법과 서울고등법원은 같은 건물에 있어 길을 잃는 일이 빈번하다.
서울남부지법엔 청사를 안내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있다. 이들은 법정을 찾은 사람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내를 해준다. 또 법정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바닥에 테이프를 붙여놨다. 이 테이프 안내선을 따라 가면 법정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다.
취재진이 남부지법을 취재하러 간 지난 29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을 두고 "스펙 쌓으려고 많이들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총 30명으로 이루어진 자원봉사자들은 오전 3명, 오후 3명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이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다.
자원봉사를 하는 50대 여성은 "그냥 봉사가 좋아서 한다"고 했다. 이들이 받는 혜택은 법원 직원들과의 식사와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이다.
서부지법도 마찬가지다. 법정을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화살표 등이 곳곳에 부착됐다. 특히 서부지법의 경우 '서부공간'이라는 미술관이 있다. 이 공간에 방문한 사람들 중 일부는 "법원이 아닌 미술관에 온 것 같다"고 호평했다.
◇11년째 이어지는 법관 평가... 실효성은?
법관평가는 사법관료주의에 대한 견제장치로 2008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주도로 처음 시작해 11년째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1월 16일 발표된 법관평가에는 2132명의 변호사들이 참여해 1만7879건의 평가표가 제출됐다.
이 평가에서 21명의 우수법관이 선정됐다. 서울중앙지법 김배현 판사, 서울서부지법 유성욱 판사는 100점 만점을 기록했고, 95점이 넘는 법관도 20명에 달했다.
이들은 사건의 충실한 심리와 공정한 재판 진행, 재판 당사자에 대한 충분한 입증기회 제공, 충실한 판결문의 작성, 높은 사건 이해도 등이 공통점으로 꼽혔다.
반면 적절치 못한 재판을 진행했다는 지적을 10명 이상으로부터 받은 5명의 하위법관들의 평균 점수는 58.14점을 기록했다. 최하위 법관의 점수는 51.23점에 불과했다.
변호사들은 이 하위 법관들이 △"왜 이렇게 더러운 사건들이 오냐"는 등 고압적 말투를 일삼은 점 △무죄 주장 피고인에 대해 "내가 오늘 구속영장을 써왔는데 잘 생각해보라"며 피고인을 협박하는 언행을 한 점 △판결문에 원고를 잘못 기재하거나 계약서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쓰는 등 부실한 판결문을 작성한 점 등을 지적했다. 이 평가에서 하위법관 5명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같은 내용은 법원행정처장, 지방법원장, 언론에 공개되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실제 법관 평가가 '막말' 재판의 개선이나 법관의 인사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 허윤 수석대변인은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라도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처럼 보여야 사법부에 대한 신뢰 등 많은 것들이 추구될 수 있다"며 "실제로 법관평가가 효과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인사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에는 법관평가 결과를 법원 인사에 반영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은 2017년 8월 발의됐지만 아직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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