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꽃> 중에서-
전북 완주가 그랬다. 전주는 알아도 바로 옆 완주는 낯선, 그런 곳이었다. 이곳을 천천히 다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완주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문화예술이 곳곳에 살아 숨 쉬는 이곳은 전주만큼 북적이지 않지만, 지난해 방탄소년단(BTS)이 촬영차 다녀간 사실이 알려지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웅장한 산자락 깊숙이 근대사의 아픈 상처를 품은 곳, 아픔을 의연히 극복한 찬연한 예술공간, 맑고 깨끗한 자연과 멋스러운 고택이 어우러진 완주의 속살은 그 어떤 화려한 비단의 색채보다도 곱고 아름다웠다.
소양면은 완주군 내에서도 풍성한 역사유적을 간직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신비로운 불상이 자리한 송광사부터 조선 시대 산성인 위봉산성까지 마을을 든든하게 감싸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명인들이 소양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은 완주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공간들을 만들어내며 지역민은 물론, 국내외 여행객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다.
대표 명소를 꼽으라면 단연 '아원'이다. 젊은 세대나 BTS 팬클럽 '아미'들에겐 BTS 촬영지로 더 유명한 곳이다.
경남 진주에 있던 250년 된 한옥을 위봉산 자락 오성마을로 옮겨온 아원은 땅의 모양새에 따라 자연스레 건물을 배치해 어디서든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고, 멀리는 종남산의 사계절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갤러리를 돌아본 후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전통미 가득한 한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청마루의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한 만휴당, 소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자리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설화당은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과 품위가 무엇인 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을 때쯤 드르륵 소리가 나며 연못이 갈라졌다.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갈라진 연못 아래엔 아까 지나온 갤러리가 있었다. 갤러리 아래에 있던 이들 시선에선 "갤러리 천장이 열리니 파란 하늘과 한옥 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며 눈이 휘둥그레질 법한 광경일 게다.
이들 사이에 자리한 현대 건축물인 천목다실은 높이를 처마선 아래로 낮추고 누드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전통과 현대가 전혀 이질감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뮤지엄 역시 옥상을 만휴당의 앞마당으로 활용해 전통과 현대의 건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현재 한옥스테이로 활용 중인 고택은 투숙객들이 없는 12시부터 4시 사이에 뮤지엄 입장객들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뮤지엄은 갤러리와 카페, 음악 감상실로 구성됐다. 진공관으로 들리는 음악이 꽤 매력적이다. 뮤지엄이나 만휴당 대청마루에 앉아 수려한 풍광을 벗 삼아 느긋하게 음료를 즐길 수도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아원고택을 나와 위봉산성으로 향하는 길, 일행은 '오성제(저수지)'에 잠시 들렀다 가자고 재촉했다. "둑 위에 우뚝 선 소나무 한 그루가 신기하다"며 "이곳에서도 BTS가 화보 촬영을 했다"는 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오성한옥마을 바로 앞에 오성제가 있었다.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의 오성제는 아침이면 드리워진 물안개와 산세의 반영이 신비로움을 선사하는 곳이라고 했다.
한낮에 찾았지만, 그 신비로움은 가히 짐작할 만했다. BTS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외톨이 소나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이동. 아원이 자리한 위봉산 능선을 따라 조선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위봉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축성했던 사적지 '위봉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쌓은 것으로, 둘레가 약 16㎞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과 조경묘에 있던 태조의 초상화와 그의 조상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피난시키기 위해 축조된 위봉산성. 실제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되었을 때 초상화와 나무 패를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성 안에는 초상화와 위패를 모실 소형 궁전을 두었으나 오래전에 헐려 없어졌다. 성의 동·서·북쪽에 각각 문을 냈는데, 지금은 전주로 통하는 서쪽에 반월형 문 하나만이 남아있다. 문루도 없이 아치형의 석문만 남은 형태이긴 하지만 옛 성곽의 웅장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짙은 회색 석문과 푸른 하늘이 연출하는 풍광은 꽤 낯설면서도 특별했다.
소양면과 동상면의 경계를 넘어서면 곧바로 우측 절벽 사이로 직하하는 높이 60여m의 위봉폭포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 명창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을 정도로 거침없는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시간을 내서 위봉산 정상에 오른다면 북쪽의 동상저수지를 필두로, 동쪽 운장산과 남쪽 마이산,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나온 송광사가 들어앉은 종남산 등이 막힘없이 조망된다.
과거 호남 최대 규모의 역참이 설치돼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삼례를 빼놓고 완주를 말할 수는 없다.
"호남은 삼례로 통한다"고 했을 정도로 삼례읍은 무척 번성했던 곳이다. 만경강 상류에 자리해 일 년 내내 곡식이 풍성하고 물길이 마르지 않았다. 이런 천혜의 환경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선 '비극'의 원인이 됐다.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양곡에 편리한 교통요건까지 갖췄으니 군량미 수탈에 열을 올리던 일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삼례역을 짓고 철도를 이용해 근처 군산으로 대량의 쌀을 빼돌렸다.
삼례역 주변에는 농민들에게 빼앗은 쌀을 저장하기 위한 양곡창고들이 세워졌고, 밤마다 "한 말 한 섬" 쌀 세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삼례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나라 잃은 아픔과 배고픔을 눈물로 삼켜야 했단다.
지금도 삼례역 주변에는 당시에 지어진 양곡창고들이 일부 남았지만, 지금은 삼례문화예술촌이란 이름을 가진 '지식의 창고'로 재탄생했다.
일본인 대지주가 사용했다는 삼례양곡창고는 다양한 장르의 작가를 소개하는 모모미술관으로, ‘협동생산 공동판매’란 글귀가 눈길을 끄는 삼례농협창고는 예술공연과 영화상영이 이뤄지는 소극장 시어터애니로 변신했다.
양곡창고를 배경으로 전시된 미디어아트와 기발한 설치작품들, 그리고 활판인쇄기와 제본기 등 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곳은 지난 2017년 무장애 동선에 따라 관람이 가능한 '열린관광지'로 선정됐다.
길 건너 자리한 삼례책마을 북하우스는 빼곡히 들어찬 수만권의 헌책이 눈길을 끄는 곳이다. 낡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풍겨오는 퀴퀴한 냄새에 잠들었던 감성이 기지개를 켰다.
이곳 역시 점자 안내도와 장애인화장실을 설치하고 노약자들을 위한 휠체어가 비치됐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자료실을 따로 조성해 유명 문학작품들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삼례문화예술촌에서 차로 3분(도보 15분) 거리에는 조선 중기에 지어진 정자 비비정(飛飛亭)이 만경강 철교를 바라보고 있었고, 맞은편엔 비비정 예술열차와 기러기도 쉬어 가는 곳 '비비낙안'이 여행자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몇 곳의 여행지로 완주를 얘기한다는 것이 퍽 아쉬울 정도로 완주는 매력이 철철 넘쳐 흐르는 여행지였다. 어지러운 이때, 기나긴 동면에 들었던 감성을 깨우기에 충분한 곳, 완주(完州)를 완주(完走)했고, 돌아온 지금 이 순간까지도 행복은 가슴속에 머물러 그날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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