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욕심없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이 냉면을 먹어보기도 전에 이른 바 '언어의 김칫국'부터 마시게 한 것은 '국수'라는 시를 쓴 백석이다. 평안북도 정주 사람으로 그에게 이 국수는 피와 살이다. 벗어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혀끝의 DNA, 목구멍의 무의식같은 것이다.
겨울철 대설 속에서 꿩고기와 김치가재미가 준비되고 뽀오얀 흰김 속에 육수가 준비되고 또 국수 뽑는 분틀에서 가락이 나오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함박눈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비에겐 왕사발 어린 자식에겐 새끼사발 그득히 국수를 감아온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매운 고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식초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샛방 쩔쩔 끓는 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뜰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욕심없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읽다보면 군침이 하염없이 도는데, 백석은 대체 이게 뭐냐고만 묻는다. 그 북쪽 사람의 다정하고 순박하고 조금은 어리숙하면서도 싱거운 그 기운을 이토록 쏙 빼닮은, 이게 음식인지 사람인지를 묻는 것이다. 음식이라 말하기엔 너무 사람같고 사람이라 말하기엔 너무 입에 그윽히 감기는 냉면 앞에서, 백석은 잊지못할 네 개의 형용사를 젓가락으로 건져올린다.
희수무레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희수무레한 것은 그 국수와 국물의 빛깔이고 부드러운 것은 그 국수가락이 순하게 입속에 들어앉는 것이고 수수한 것은 어떤 장식도 없지만 그 진실한 내면이 그대로 온 몸으로 섭취되는 것이고 슴슴한 것은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아니 처음에는 싱겁지만 가만히 먹다보면 온 몸과 식감 전부가 간을 맞추는 것 같은 그 희한한 맛의 비밀이다. 평양냉면의 4덕(德)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엄지를 치킬 수 있는 건 슴슴한 맛이다. 여름만 되면, '평냉광'들이 환장을 하게 된다는 그 '슴슴함'에 대해선 따로 기념을 하고 가는 게 예의다.
슴슴하다는 말은 북쪽 사투리라고 할 수 있으며 굳이 흔히 쓰는 말로 고치면 심심하다가 된다. 우리도 음식이 심심하다는 말을 쓰지만 심심한 것이 어찌 슴슴한 것과 같겠는가. 우레옥이나 을밀대의 평양냉면을 처음 접했을 때 혀가 반응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슴슴함이 무엇인지 알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간 냉면 육수나 각종 국물에서 익숙해진 간간한 무엇이 싱겁게도 빠져나가버린 그 맛이다.
다른 냉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냉면인지라, 뭔가 간이 덜 들어 왠지 손해보는 것 같은 그 밋밋한 맛. 닝닝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맛.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맛. 단번에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맛의 주장이 없는, 오히려 그 주장을 빼버리면서 사람의 미각을 살짝 당황시키는 그 맛. 그것이 슴슴하다는 말에 숨어 있다.
슴슴한 맛은 심심하지 않다. 심심한 맛은 간을 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결여된 맛'이지만 슴슴한 맛은 그 맛 그대로 완성된 맛이다. 슴슴한 맛의 정체를 알려면 삼삼한 맛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슴슴함에서 염도를 조금 올려서 간간한 기운 쪽으로 가고 있는 게 삼삼한 맛이다. 물론 슴슴함과 삼삼함의 차이는 단지 염도 차이가 아니다. 슴슴함은 슴슴한 육수를 여러 숟갈 들이켜보며 스스로 몸이 간을 맞추는 느낌의 완성태이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간을 느껴 그것을 지속하는 삼삼함과는 그 맛의 진전이 다르다.
슴슴한 것은 심심한 것이 아니다
슴슴한 사람이 있다. 평양냉면 같은 사람이라 해야할 슴슴한 사람 말이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 사람, 처음과 지금까지의 그 싱거움이 쌓여 깊이 간이 배는 사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중독된 사람. 그 사람에 대한 갈증이 나서 견딜 수 없는, 그 맛이 생각나서 점심 나절 거기로 뛰어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슴슴한 사람이다.
2018년 9월 평양 옥류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오찬을 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제가 먹어왔던 평양냉면 맛의 극대치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뉴스를 보던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목젖이 아프도록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이전 4월27일 판문점 정상회담 때는 옥류관 제면기를 북한이 아예 실어왔고 이 식당의 수석요리사까지 딸려와서 문대통령에게 냉면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이후 남북이 이런저런 곡절 끝에 꼬이는 상황으로 치닫자, 애꿎은 냉면이 핀잔과 공격의 구실이 됐다. 2018년 9월 이선권 북한 외무상이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에 온 남한의 경제인들을 향해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가냐"라고 다그칠 때만 해도, 좀 심하고 부적절하긴 해도, 북한 스스로가 하도 답답한 상황이라 하는 소리 쯤으로 여겼다. 물론 그런 얘기를 들으며 냉면을 먹고 있는 기업인들로서 정말 이 불편한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냉면 한 그릇 내주면서 너무 유세를 떠는 게 아니냐는 심정을 억눌렀을 수도 있다.
'냉면의 얼굴을 한' 인간의 배신
그런데 최근 옥류관 주방장 오수봉이란 사람이 북한의 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에서 문대통령을 향해 "평양에 와서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냉면집 주방장이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퍼부은 것도 기이하지만, 그 말의 내용이 북한이 벌이고 있는 심리적 압박공세를 그대로 타고 있는 점이 더 섬뜩했다. 냉면이 그대로 어리숙한 적 하며 철저히 실익만을 기대하는 '정치'였고 그 슴슴한 '맛의 극대치'가 북한 체제의 '홍보무기'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른 바 냉면의 배신이었다. 북한의 현재는 그 슴슴한 냉면을 전혀 닮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핵보유 국가로 인정받으며 미국의 대북제재를 푸는, '불가능한 거래'를 이뤄내기 위해 남쪽을 지렛대 삼고 미국의 정치를 이용해 흥정판을 벌이기 위해, 저 '냉면의 얼굴'을 가식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냉면의 슴슴한 맛이 왜 사람을 붙잡는지 그들은 깊이 이해할 겨를이 없는지도 모른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것이 그 슴슴함의 매력이요, 시작과 끝이 한결같은 것이 그 슴슴함의 비밀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 북한이, 그 냉면을 먹던 날을 이야기하며 욕설을 퍼붓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남쪽의 수많은 지원을 받아왔으면서, 냉면 한 그릇 대접한 것으로 유세를 떠는 것도 실은 같잖은 짓이다.
옥류관의 냉면 맛이 아무리 극대치라고 해도, 북한처럼 이용하면 시대에 동떨어진 체제가 빚어내는 요사(妖邪)의 맛일 뿐이다. 백석이 말한 '그지없이 욕심없고 소박한 맛'일 수 없다. 냉면의 맛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체제의 강박과 변칙에 길들여진 사람의 맛이 달라진 것이다. 냉면은 배신하는 일이 없다. 사람이 배신할 뿐이며 체제와 그 지배자가 배신할 뿐이다.
평양냉면은 차갑다
가만히 음미해보면, 냉면은 차가움을 기본 맛으로 하는 음식이다. 그 서늘한 기운이 감각의 통쾌함과 미각의 긴장을 돋운다. 지금은 냉면이 지낸 '차가움'까지 읽어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겨울날을 차가움으로 이겨냈던 옛사람들의 지혜 속에는, 고난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는 긍정적 사유가 있다. 대북관계 속에서 우리가 냉철한 이성을 견지하되,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좋은 기회를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할 이유가 냉면에 담겨있다. 이 음식이 지금 우리에게 말하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일지도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