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한 여성을,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피해호소인'이라고 불렀다. 민주당 젠더폭력대책TF위원장도 그렇게 불렀다. 이낙연의원은 '피해고소인'이라 불렀다. 민주당 허윤정 대변인은 "수사가 종결됐기 때문에 고소인이라고 쓸 수 없으며, 법적 자기방어를 할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피해 호소인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논리를 세워 설명했다. 서울시에서도 '피해를 호소한 직원'으로 표현했다. 야당의 김은혜 대변인은 "의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우아한 2차 가해 돌림"이라고 꼬집었다. 피해호소인이란 말은 이런 궁금증을 낳는다. 피해를 사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라면 대체 무엇을 사과하는 것일까.
민주당 당헌을 비켜가기 위한 수단?
민주당과 서울시는 왜,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고 '피해호소인'이란 낯선 말로 그 여성을 표현할까. '피해' 를 확정하지 않고, 다만 그의 입에서 나온 호소에 불과한 상황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피해자에겐 반드시 가해자가 있어야 하지만, 피해호소인에겐 가해자와 가해사실이 없을 수 있다. 일방적인 호소일 경우까지 상정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객관보도와 닮았는데
사실, 여당의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합리적인 말일 수 있다. 성추행 혐의가 밝혀지려면 수사 결과가 있어야 한다. 결과가 확정될 때까지는, 모든 범죄는 아무리 논의의 여지가 없어 보여도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가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피해 또한 확정될 수 없다. 그래서, 현상태로는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언론의 많은 보도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신중함과 객관성을 유지해왔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민주당의 '문제'는, 그런 원칙적 기준이 지금까지는 지켜지지 않다가, 자당(自黨)의 명예와 이익이 걸린 사안에서 갑자기 신중해진 데에 있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경우, 우리 사회에서 '여론단죄'가 당연한 정의감과 동일시되어 왔고, 그런 일에 민주당이 팔을 걷고 앞장서서 대개의 피해자의 여성 권익을 외쳐왔기에 이번의 경우가 낯설게 보이게 된 것이다. 다른 당의 문제나 자당과 상관없는 문제에 있어선 그토록 목소리를 높이고 핏대를 올리던 이 당과 이 정권이, 안 그래도 2차 가해의 발언들이 쏟아져 가시방석에 있을 피해자를 최종결론이 나올 때까지는 피해자로 특정(特定)할 수 없다는 태도로, 약속이나 한 듯이 '피해호소인'이란 말을 쓰는 점이 정략적 태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입맞춘듯 같은 표현을 쓰는 까닭
이런 표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말을 하는 특정인의 신중함을 담은 말이라고 넘길 수 있었던 사람들이, 여권에서 이 말이 거듭되자 여기에 '잘 짜여진 전략과 각본'이 있는 것처럼 의심하게 된다. 누군가가 '피해호소인'이란 말을 개발했고 그것을 공유하여 거듭해 반복함으로써, 피해자의 주장이 현상태로는 주장에 불과하며 박원순 시장의 가해의 내용과 범위가 '호소'와는 다를 수 있다는 여지를 굳히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됐다. 이게 여권의 입에 붙은 '피해호소인' 언급이 지닌 함의가 아닐까. 그래서 이 신중함이 2차 가해에 가깝다는 말이 나온다. 객관화의 외형의 입힌 언어의 곡예가, 이 사건의 결론을 예단하고 있는 듯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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