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의 가을은 매력이 흘러넘쳤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서서 느끼는 쾌청한 바람이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저마다 다른 풍광과 느낌을 품고 있었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전율이 온몸을 훑었다. 지친 심신을 '치유'한 그곳······. 바로 강원 원주다.
#잠시 멈추고 돌아보기
원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뮤지엄 산(SAN)이다. 언제부턴가 원주를 여행할 때 뮤지엄 산을 빼놓지 않았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는 것도 좋았지만, 어느 곳이든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서 있어도 어지러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웰컴센터를 출발해 플라워가든과 워터가든, 그리고 뮤지엄 본관과 스톤마운드로 이어진다. 그 뒤편은 뮤지엄 산을 구성하는 또 한 명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상설관이다. 이곳은 한꺼번에 모든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과 밖으로 시선을 열었다, 다시 닫으며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 모두에서 안도 다다오의 손길이 느껴졌다.
얕은 연못이 바람에 실려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물에 비치는 건물의 반영과 벽에 산란하는 빛이 이루는 오묘한 조화는 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야외에 펼쳐진 스톤가든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신라 고분을 모티프로 했다는 이곳에는 16만개의 귀래석과 4만8000개의 사고석으로 완성됐다.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커플'을 시작으로 베르나르 브네의 '부정형의 선', 헨리 무어의 '누워 있는 인체' 등 조각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곳의 백미는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상설관이었다. 안도 다다오와 여러 차례 협업한 적이 있는 제임스 터렐의 전시는 뮤지엄 산 관람에 정점을 찍었다.
그는 건물을 캔버스 삼아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결과물은 적잖은 시각적 충격을 안기며 빛의 숭고함을 되새겨보게 만든다.
실제 하늘이 보이지만 내부에 설치된 인공의 빛이 간섭해 하늘과 실내의 빛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스카이 스페이스'에서 신비한 빛의 환영을 보고, 정면 계단 끝에 정사각형으로 뚫린 창에서 내뿜는 변화무쌍한 빛의 변화가 놀라웠고, 마지막 계단에서 마주하는 반전이 가슴을 울렸다.
화면으로 들어가 빛의 안개 속을 거니는 듯한 '겐지스필드'와 가상과 실상 사이에 혼돈을 안기는 '웨지워크'까지 30분 남짓한 작품 감상 시간이었지만, 잔상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모든 작품을 감상하고 야외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층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물빛에 스민 가을의 빛깔이 참으로 고왔다. 촬영차 다녀갔다는 배우 공유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나오고 싶지 않았다. 온종일 이곳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뮤지엄 산에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간현관광지로 향했다. 이곳에는 작은 금강산이라 불리는 '소금산(해발 343m)'과 여행 명소로 입소문이 난 '소금산 출렁다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산악보도교는 통상 산행의 편의를 위해 설치하는데, 소금산 출렁다리는 사업 진행 초기부터 편의보다는 '재미'와 '관광'에 무게를 두고 설치됐다. 200m의 긴 출렁다리를 건너기 위해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면서 단숨에 명소가 됐다.
소금산 출렁다리의 진정한 매력은 놀이기구 못지않은 스릴을 맛볼 수 있다는 데 있다. 578개 계단만 오르니 탁 트인 풍광과 함께 긴 출렁다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닥 전체가 격자형 강철 소재로 돼 있어 사방이 뚫린 느낌이었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자신하던 일행은 다리 위에 서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지, 발을 제대로 떼지도 못한 채 한참을 출렁다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마침 이곳서 원창묵 원주시장을 만났다. 원 시장은 "간현관광지에 내년 말 초대형 미디어파사드를 선보일 계획이니, 그때 꼭 한번 다시 와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관광 콘텐츠와 시설을 지속 보강할 계획이라고도 덧붙였다.
스릴이 넘치다 못해 오싹한 출렁다리 체험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떨려 걷지 못하겠다고 하니, 일행은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재미있는 체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유혹했다.
조금 전만 해도 무서워서 발걸음을 옮기지도 못했던 그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의욕이 넘쳤다. 그의 속삭임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호젓하고 아담한 시골역, '간현역'이었다.
출렁다리에서 도보 약 10분만 이동하면 만날 수 있는 이곳에는 레일바이크가 있었다. 1940년 개통된 간현역이 2012년 운행이 중지되면서 추억을 싣고 달리는 레일바이크로 재탄생했다.
'다리조차 떨리는데, 발을 굴러야 한다니...' 역시 유혹이 달콤하다면 한번쯤 의심해봐야 했다.
눈치를 챘는지, 일행은 "원주 레일바이크는 조금 특별하다. 간현역에서 풍경열차를 타고 판대역에서 하차한 후에 레일바이크를 타고 간현역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빨간 풍경열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20분. 뻥 뚫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은 생각보다 꽤 차가웠지만, 이 바람에 일상의 잠념을 실려 보낼 수 있었기에 퍽 상쾌했다.
풍경열차가 판대역에 멈춰 서고, 레일바이크로 옮겨 앉아 이내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벗 삼아 내달리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물이 철길의 곡선과 어우러졌다. 음악터널, 이벤트 터널, 고백터널, 레이저 조명 터널까지 이색 터널을 지날 땐 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출렁다리의 오싹함도, 일상의 근심도 잊은 채 열심히 달렸다. 재미와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시간, 그렇게 원주의 밤은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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