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저물가는 돈맥경화를 진단할 때 빠지지 않는 요인이다. 저성장 국면에서 투자처는 사라지기 일쑤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아지면 앞으로 더 하락할 것을 기대해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기 때문이다. 소비와 투자 위축은 기업의 매출 감소를 일으키고, 이는 고용률과 임금상승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일자리가 위태해지면 지갑은 더 닫을 수밖에 없다. 다시 돈맥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성장·저물가는 돈맥경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까. 한국경제연구원이 2001년 1월부터 2019년 11월까지 월별 자료를 기초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통화유통속도는 국내총생산(GDP)이 1% 증가할 때 1.3%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 포인트 오를 때 통화유통속도는 0.8% 빨라졌다. 반면 유동성(M2)이 1% 늘어나면 유통속도는 0.96% 하락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즉, △유동성은 줄이고 △GDP는 늘리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오르도록 하면 돈이 도는 속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유동성은 줄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정부가 대대적인 돈 풀기에 나섰고, 가계와 기업들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진 탓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M2(말잔)는 3092조원이다. M2는 매달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데, 올해 들어 역대 최대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을 보면, 2016년 말 7.1%에서 2017년 말 5.1%로 낮아졌지만, 2018년 말 6.7%, 2019년 말 7.9%로 높아지더니, 올해는 8~9%대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5월에는 10.6% 증가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GDP 성장률은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된다. 내년에는 플러스(+) 전환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지만, 문제는 외환위기 전까지 보였던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경제 구조가 됐다는 점이다. 소비자물가는 지난달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0.3%)이 21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만성적인 저물가를 나타내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1%에 불과했다.
저성장·저물가 기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업과 가계가 지갑을 열도록 하는 '수요 촉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저물가가 만성적인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는 GDP 성장률과 다른 실물지표들의 부진이 합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요 부진을 해소해 저물가 상황에서 벗어나야 저성장 국면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며 "이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성일 한경연 경제정책팀 팀장은 "가계와 국가경제는 한국 모든 기업들이 경영부담을 얼마만큼 떠안는지와 연계될 수밖에 없다"며 "법인세 부담 완화, 투자 및 R&D(연구개발) 지원 확대, 유연한 노동시장 구축 등 기업 친화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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