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nail)이 없으면 편자(horseshoe)를 잃어버리고, 편자가 없다 보니, 말까지 잃는다. 말이 없으면 기수를 잃는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남긴 격언이다. 편자는 말발굽에 대는 쇳조각을 가리키고, 본 격언은 작은 문제가 큰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를 ‘편자의 못(horseshoe nail)’에 비유했다.
반도체와 경제
반도체는 장난감에서부터 우주항공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된다.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소비자는 TV, PC, 휴대전화, 자동차 등과 같은 완제품을 구매하지만, 완제품을 만드는 제조사들은 부품인 반도체를 조달받는다. 사람이 기기를 이용(기기의 버튼을 누름 등)한다는 것은 정보(Data)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혹은 그 반대로 전환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정보의 처리를 반도체가 한다. 그뿐 아니라 정보를 저장하고 동작을 제어하는 역할도 반도체가 한다. 인간의 삶이 전자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수많은 기기들이 ICT 기술들과 융합하면서 반도체의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단적인 예로, 내연기관차에 약 200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면, 전기차에는 1000개의 반도체가, 자율주행 전기차에는 그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한 것이다. 반도체를 빼놓고는 미래 경제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수출뿐만 아니라 투자, 생산, 고용 등 한국경제 전반에 반도체가 기여하는 바는 상당하다. 설비투자에 있어서도 반도체는 약 12%의 비중을 차지한다.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약 16.8%를 차지하고, 제조업 총 취업자의 약 4.4%에 달한다. 2021~2022년에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투자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디지털 뉴딜사업과 기업들의 제조 및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가 맞물리면서 수요도 뒷받침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반도체 신냉전’의 서막
2021년 상반기에 쟁점이 되고 있는 반도체 대란은 세계경제에 상당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편자의 못’이 기수를 잃게 하듯, 완제품 제조기업들의 생산에 차질을 일으키고, 반도체 산업의 지각변동을 촉진시켰다. 전 세계 자동차 업계 손실이 약 610억 달러(약 69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폭스바겐, 포드, 아우디, 도요타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생산량을 감축했다. 현대·기아차도 특근을 취소하는 등 생산량을 조절하고, 가동률을 축소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만의 일이 아니다. IT, 가전, 스마트폰 등 다른 산업으로 문제가 확산하고 있다. 반도체 부족으로 TV용 LCD 패널 가격도 폭등했다. 폭스콘도 아이폰 생산량의 10%가 감소하고, 세계 가전 1위 기업인 미국 월풀의 중국 법인은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는 가전제품 물량의 25%가 줄었다.
반도체 품귀현상은 단기적 이슈가 아닌, 반도체 산업에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주요국들이 자체적인 반도체 생산 역량을 구축하겠다고 나섰다. 세계 주요 반도체 소비국들은 ‘공급망 공포’에 대응하는 모습이다. 대만(TSMC·UMC)이 64%, 한국(삼성전자)이 17% 파운드리 영역을 장악하고 있어, 충분한 반도체 공장을 보유하지 못한 나라들은 경제를 넘어 안보상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만과 한국의 파운드리가 전쟁이나 경제제재 등으로 충격을 받으면 미국과 유럽의 산업 전반이 마비될 수 있다.
반도체 패권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 열강들이 반도체를 놓고 벌이는 신냉전 체제에 진입한 것이다. 트럼프 재임 동안 있었던 미·중 무역전쟁을 회상해 보자. 중국에 반도체 공급을 차단하는 경제제재가 중요한 공격수단 중 하나였지 않았는가? 반도체 패권전쟁은 미·중 무역전쟁의 일환이며, 세계 주요국들이 자국으로 기업들을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전쟁의 하나다. 즉, 반도체 패권전쟁은 보호무역주의 시대의 정점이 될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 50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바이든의 가장 두드러지는 정책적 행보가 반도체 산업 육성이고, 반도체 인프라 투자 법안을 마련해 공격적으로 투자할 계획이다. 인텔은 200억 달러를 투자, 신규 반도체 공장을 2개 설립해 파운드리 시장에 재진출할 계획이다. 인텔은 파운드리 업계 주요 고객사인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퀄컴, 애플 등을 끌어올 전략이다. 더욱이 미국은 단기간 내에 파운드리 자립화가 어려울 것을 고려, TSMC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자국 내에 설립하도록 유도할 전망이다.
중국은 2015년에 이미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릴 목표로 자국 내 최대 반도체 기업인 SMIC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목표 달성은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지만, 중국의 해외 반도체 기업 합병과 기술 추격은 상당한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묻지마 자금 지원’이나 ‘인재·특허 빼가기’도 서슴지 않고 있다. 28나노 이하의 미세 공정에 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하는 등 공격적인 지원책을 마련했다.
대만은 1위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있다.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이론으로, 기술 추격이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한 개념이다. TSMC는 2020년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최초로 5나노 칩 양산에 돌입했고, 대만 남부에 3나노 칩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TSMC는 2021년 1월 280억 달러의 설비투자를 계획했으나 4월 들어 300억 달러로 투자계획을 상향조정했다. 선두주자가 후발주자의 추격을 수포로 만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반도체 신냉전 시대의 전략
첫째, 반도체 공급 부족의 장기화에 대응하라. 반도체 수급불안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세계 반도체 품귀현상은 2021년 내내 지속될 것이고, 스마트폰 등과 같은 첨단제품의 경우 2022년, 자동차 등과 같은 일반제품은 2023년이 되어서야 공급난이 해소될 전망이다. 이는 곧 반도체 수급역량이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는 의미다. 정부는 우선 기업들의 반도체 재고와 밸류체인 전반의 수급 여건을 진단하고, ‘편자의 못’이 될 부분을 탐색해야 한다. 나아가 단기 혹은 중기에 걸쳐 반도체 수급에 차질을 빚는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원을 해야 한다.
둘째,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자립화해야 한다. 자동차 혹은 자동차 부품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어떨까? 세계 주요 자동차 강국들은 자동차 시장 점유율보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점유율이 훨씬 높다. 예를 들어, 미국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31.4%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11.7%이다. 그러나 한국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2.3%로, 자동차 시장 점유율 4.3%에 못 미친다. 차량에 탑재되는 부품은 오작동 시 사고로 연결될 위험이 높고, 다른 반도체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져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그동안 꺼려 왔다. 그러나 자율주행차 등의 미래 성장성이 크거나 필수적인 차량용 반도체를 위주로 공급망을 내재화하는 전략을 고려해야 한다. 자동차의 전장화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고, 자동차는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2위 주력 수출품목이다.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을 합치면, 한국 수출의 약 10.9%를 차지한다.
셋째, 가지고 있는 것은 지키고, 부족한 것은 채워야 한다. 먼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지킬까? 파운드리 공장을 확보하고, 메모리 반도체의 우월적 지위를 공고히 해야 한다. 한국판 무어의 법칙을 만들어야 한다. 열강들이 반도체 자립화를 추진해 나가고, 중국의 기술 추격을 저지할 수 있도록 기술격차를 벌려야 한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전략도 요구된다. 시스템 반도체에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재 유출을 막는 것도 필요하고, 해외 우수 인재를 유입하는 전략도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향후 반도체 설계나 소재 및 장비를 확보하는 데 차질이 있을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의 밸류체인이 한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반도체 설계 역량을 확보하고 소재와 장비를 국산화하기 위해 공격적인 M&A와 R&D 투자를 촉진하고, 기술교류를 지원해야 한다.
김광석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센터 본부장△한양대학교 겸임교수△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센터 본부장△한양대학교 겸임교수△삼정KPM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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