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이것이 잃어버린 '광주소리'다 ...명창 박동실을 들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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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6-2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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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⑩ 박동실 . 1945 광주극장 울린 '해방가'는 그의 노래였다

박동실(朴東實 1897∽1968)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은 판소리를 통해 항일운동을 한 행동하는 명창이자 이론가였다. 그가 1945년 광복 전후에 창작한 열사가(烈士歌) 중 ‘윤봉길 열사가’의 한 대목을 보자. 윤봉길(尹奉吉) 열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터트려 시라카와(白川) 대장을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킨 그 사건의 그 장면 말이다.

“(휘모리)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번개 같이 일어서서 백천 앞으로 우루루루루. 폭탄을 던져 후닥툭탁 와그르르르 불이 번뜻. 백천이 넘어지고 중광이 꺼꾸러지고 야촌이 쓰러지고 시종관이 자빠지다 혼비백산. 오합지졸이 도망하다 넘어지고 뛰어넘다 밟혀죽고…그 때여 윤봉길 씨 두 주먹을 불끈 쥐고…하하 그놈들 잘 죽는다.… 대한독립 만세를 불러노니…”

이 노래를 듣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쾌했을 것이다. 마침 광복이 아닌가.(‘윤봉길 열사가’는 광복 이후 창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판소리하면 우리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정리한 전승 5가(歌), 곧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흥부가를 떠올린다. 박동실은 이 5가를 잘해서 명창이고, 덧붙여 판소리까지 만든 사람이다. 문외한도 술자리에서 한번쯤은 들었을 사철가(사절가)도 그의 작품이다.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다/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 허구나/….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

1945년 10월, 광주시 광주극장에선 이 지역 국악인들이 다 모여 해방 기념 공연을 가졌다. 마지막에 출연진 전원이 나와 ‘해방가’를 불렀고, 관객들도 일어나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반가워라 반가워/ 삼천리 강산이 반가워/모두들 나와서 손뼉을 치면서/활기를 내어서 춤을 추어라/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반가워라 반가워라/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세/…” 이 해방가도 박동실이 작사 작곡한 것이다(박선홍, 『광주 1백년 2』, 2014년).

‘사철가’와 ‘해방가’는 단가(短歌)여서 완창에 몇 시간씩 걸리는 전승 판소리와는 구별된다. 박동실은 전승 5가에 터를 잡은 양반‧특권층의 판소리를 시대와 함께 하는 판소리, 민족성이 깃든 판소리, 대중성이 살아 있는 판소리로 바꾸었다. 윤봉길 외에도 ’열사가‘의 대상 인물인 이준(李儁 1859~1907),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의 항일 행적을 비장미 넘치는 판소리에 담음으로써 본격적인 창작 판소리의 시대를 열었다. 그만큼 판소리의 외연을 넓힌 것(정병헌, ‘명창 박동실의 선택과 판소리사적 의의’ 2002년).

물론 ‘열사가’는 광복 전후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항일과 일제 잔재 청산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박동실의 창작물이고, 어디까지가 구전(口傳)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박동실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월북해버려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열사가’는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의 그릇에 항일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민족적, 예술적 의의가 심대하다. 그를 빼고 예향(藝鄕), 광주의 정신을 논할 수 없는 이유다.

박동실은 담양 객사리 241번지에서 태어났지만 제적등본에 따르면 부모는 광주 본촌면 용두리현 북구 용두동 467번지에 살다가 도중에 담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1929년 어머니 배금순(裵今巡)이 사망한 곳도 광주 용두리였다고 한다(박선홍, 앞의 책).

‘하얀나비’를 부른 김정호의 외조부

박동실은 대대로 소리하는 집안 출신이다. 9살 때부터 아버지(박장원)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는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배희근)도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박동실은 명창 김소희와 같은 집안인 김이채와 결혼해 1남3녀를 뒀다. 이 중 둘째딸(숙자)의 아들, 곧 박동실의 외손자가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같은 히트곡을 남긴 송라이터 가수 김정호다. 그는 1985년 34세에 폐렴으로 요절할 때까지도 꽹과리와 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박동실은 김채만에게 서편제를, 부친에겐 동편제를 배웠다. 제자 한애순(韓愛順1924~2014)은 “선생님은 동편과 서편을 섞어서 소리가 맛있었다.”고 회고했다(배성자, ‘박동실 판소리 연구’, 2008년). 박동실은 스승 김채만(金采萬 1865~1911)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김채만은 담양의 전설적 명창 이날치(李捺治 1820~1892)를 잇는 서편제의 대가. 그에게서 뻗어나간 소리를 ‘광주소리’라고 하는데, 박동실이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이경엽, ‘박동실과 담양 판소리의 전통’, 2019). 그의 ‘심청가’가 대표적인 서편제, 박동실제(制) 광주소리다.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 고창 등 호남의 서남부 평야지역에서 발달한 유파로, 세련된 기교와 섬세한 감성이 부각된다. 동편제는 구례, 남원, 순창, 곡성 등 호남 동부 내륙지방의 유파로 선이 굵고 꿋꿋한 소리제의 특성을 갖는다. 흔히 동편제는 담담하고 채소적(菜蔬的)이며, 천봉월출격(千峯月出格)이고, 서편제는 육미적(肉味的)이며, 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라고들 한다(한국민속예술사전).

박동실은 1930년대 중반, 담양 창평 출신의 후원자 박석기(朴錫驥 1899~1953)를 만나면서부터 후학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박석기가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에 국악초당을 짓고 그를 선생으로 초빙했기 때문이다. 모두 30여명을 가르쳤는데 공부에 게으르면 나이 불문하고 체벌을 가할 만큼 엄격했다고 한다. 김소희, 한애순, 김녹주, 한승호, 박귀희, 장월중선, 김동준, 임춘행, 박후성, 임유앵 등 당대의 명창들이 다 그의 제자다.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박동실은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월북한다. 친일파의 득세와 소리꾼에 대한 홀대 탓으로 추정된다. 광복 이후 국악계도 일제 청산 문제를 놓고 좌우 갈등을 겪었다. ‘열사가’를 창작한 박동실로서는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는 꼴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정병헌, ‘담양소리의 역사적 전개’, 2019년). 박동실의 조카 박종선은 “큰아버지가 북에 간 것은 소리꾼 신분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고 말했다(김기형, ‘박종선 명인 대담’, 2001년).

박동실은 북에서 인민의 전투적 투쟁심을 고무하는 단가와 장가(長歌) 수십 편을 창작한다. 창극 ‘춘향전’을 현대화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성악 유산을 수집 정리하고 여러 편의 논문도 발표했다. 1957년 9월 김일성이 차려준다는 환갑상과 함께 공훈배우의 칭호를 받았고, 1961년 7월 예술인 최고의 영예인 인민배우가 된다. 그러나 1964년 김일성이 판소리가 양반의 노래이고 듣기 싫은 탁성(濁聲)을 낸다며 불쾌감을 드러낸 이후 판소리는 사라진다. 대신 혁명가극이 등장하고, 박동실은 1968년 12월 4일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박동실이 월북하면서 그에 관한 모든 게 금기(禁忌)가 됐다. 제자들은 1988년 박동실이 해금(解禁)될 때까지 그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했다. 판소리의 한 맥(脈)이 끊긴 것이다. 그러나 끊어지면 이어지고, 이어지면 끊어지는 게 세상사.

소리는 梨大 출신 명창에게 이어지고

박동실이 죽기 하루 전날. 남쪽 그의 고향 담양에선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가 명창 권하경(權夏慶‧53). 그는 박동실의 제자 한애순에게 소리를 배워 지금 ‘박동실제 판소리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전병헌에 따르면 “한애순은 박동실의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유한 명창으로, 그가 광주예술고에서 판소리 선생으로 있을 때 학생이었던 권하경을 만나 박동실제 ‘흥보가’와 ‘심청가’를 그대로 전승했다.”고 한다. 실로 절묘한 인연이다. 환생?

권하경은 ‘흥보가’ 이수자로 국가무형문화재 5호이자, ‘명인’이다. 전남대 예술대 국악과를 거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심청가 진계면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담양창극예술단장, 담양소리전수관장도 맡고 있는 그는 요즘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아이들에게 판소리와 남도민요, 고법(鼓法)과 장구 등을 가르친다. 그에게 판소리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유네스코(UNESCO)는 2003년 우리 판소리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지만 박동실 등 주요 명창의 소리는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함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판소리는 한문, 역사. 음악 등 많은 분야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종합예술입니다. 삶의 희로애락을 잘 녹여서 관객에게 전달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흰 종이 위에 한 일(一)자만 그려도 인생이 보이는 판소리를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경엽 교수는 “박동실제 판소리를 특화한 판소리 감상회를 열어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화해야 한다.”면서 ”음원자료가 특히 중요한데 지금껏 알려진 박동실의 녹음자료는 ‘오케이 레코드’ 12227번에 수록된 ‘흥보가’ 중 ‘흥보치부가’가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정병헌은 “박동실이 월북해 담양소리가 위축됐지만 결과적으로 담양소리는 북한으로 그 영역을 넓힌 셈”이라면서 “남북 사이에 장차 예술교류가 활발해질 때를 대비해 이제라도 담양소리를 복원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철가’ 끄트머리에서 박동실은 “…국곡투식(國穀偸食-나라의 곡식을 훔쳐 먹음) 허는 놈과 부모불효 허는 놈과 /형제화목 못허는 놈 차례로 잡어다가/저세상 먼저 보내버리고/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앉아서/한잔 더먹소 덜먹게 허면서/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라고 노래 한다. 남북이 그런 날이 올랑가 모르겠다.
 

명창 권하경(權夏慶‧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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