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오늘날엔 별로 이상할 게 없다."
"십여년간 알리바바와 함께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흔들린다."
"빛나던 존재감이 어떻게 이렇게 무너지나. 실망, 무기력, 분노가 밀려온다."
최근 알리바바 여직원 성폭행 사건에 대해 중국 알리바바 전·현직 직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이들은 최근 알리바바그룹 내 여직원 성폭행 사건 발발 후 은폐에만 급급했던 경영진의 사건 처리 방식에 극도의 실망감을 느끼고 있다.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가 그토록 중시했고 알리바바 직원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며, 너도나도 모방하려 했던 알리바바 기업 문화와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낡은 아파트에서 18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알리바바도 오늘날 직원 25만명의 대기업으로 비대해지면서 대기업 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알리바바 '807사건'으로 드러난 대기업病
알리바바 여직원 성폭행 사건의 전말부터 살펴보자. 사건은 지난 7월 27일 산둥성 지난시 출장 중 강제로 끌려간 술자리 직후 발생했다. 다음 날 피해 여직원은 현지 경찰 신고 후 윗선에 수 차례 성폭행 피해 사실을 보고했지만 '외면'당했다. 알리바바 사내 식당에 피해 사실을 고발한 전단지를 돌렸지만 호응을 얻기는커녕, 보안요원에 의해 쫓겨났을 뿐이다.결국 사건 발생 후 11일이 지난 8월 7일 피해자가 알리바바 내부 인트라넷에 8000자에 달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올리면서 알리바바 그룹은 발칵 뒤집어졌다. '807사건'은 비로소 외부로 알려지며 중국 SNS 웨이보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
그제서야 8일 새벽 알리바바 경영진의 공식 반응이 올라왔다. 사건 발생 후 12일이 지난 후다. 장융 알리바바그룹 회장은 충격, 분노, 수치심을 느낀다며 즉각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이후 가해자는 모두 해고돼 경찰에 체포됐으며, 여직원의 보고에 '무관심'으로 대응했던 인사 책임자도 문책됐다. 하지만 사건 은폐와 늦장 대응은 논란이 됐다.
전문가들은 표면적으로는 인사팀 책임자의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공감 능력이 부족했던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결국엔 기업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무사안일주의, 관료화, 암묵적 관행, 의사결정 지연 등의 대기업병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국 인민대 재정금융학원 정즈강 교수는 중국경제주간을 통해 "807사건으로 알리바바에도 '대기업병' 증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줬다"며 "조직 계층이 많아지고 관리 체계가 길고 복잡해지면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발견과 해결이 지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비결은 '여성'이라더니···" 성희롱 문제 '도마 위'
807사건을 계기로 알리바바의 여성 인재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문제점도 노출됐다. 특히 조직 구조가 비대해지면서 상부와 하부 직원의 권력 격차가 커져 직장 내 성희롱의 잠재적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마윈 알리바바 창업주가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은 '여성'"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른 어떤 기업보다 여성을 중시하는 기업으로 알려졌던 알리바바다.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는 다른 인터넷기업과 달리 알리바바는 최고재무관리자, 최고인사관리자도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알리바바 여성 고위직 비중이 3분의1이 넘는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알리바바의 여성 존중 기업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졌다.
알리바바 특유의 '파빙(破氷) 문화'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얼음을 깬다는 뜻으로, 자신의 밑바닥까지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파빙 문화를 핑계로 성희롱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졌음도 드러났다.
뉴욕타임스(NYT) 중문판은 알리바바 전 직원을 인용해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신고식으로 파빙의식을 갖는다. 여기서는 지극히 사적인 것도 털어놓아야 한다.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까지, 수위 높은 성적 발언이 오간다"고 전했다.
''807사건에 대한 알리인의 알리인 돕기' 단체도 성명에서 파빙 등을 통해 성희롱 행위가 이뤄지는 것을 근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단체는 알리바바 기업의 잘못된 관행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취지로 직원 6000명이 참여해 자발적으로 결성됐다. 특히 성차별·성희롱 문화 근절에 중점을 두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의 한 경영대학원 교수는 중국 제일재경일보를 통해 "과거 많은 기업 경영인들이 성희롱 예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어도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지 않았다"며 "807사건은 모든 기업에 경종을 울렸다"고 지적했다.
"기업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 아닌 기업문화"
사실 알리바바는 그동안 기업문화·가치관을 중요히 여겼다는 점에서 이번 807사건은 중국 사회 전반에 충격을 안겼다.
마윈 창업주는 줄곧 "기업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이 아닌, 기업문화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기업의 성공은 기업문화와 직결된다고 믿었다. 기업문화를 통해 직원들이 공동의 사명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일하면서 더 강력한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리바바의 기업 가치관은 2001년 창업부터 현재까지 기업 발전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업그레이드됐다. 특히 중국 유명 무협소설가 진융의 열렬한 팬이었던 마윈이 중요시 여겼던 의로운 협객 정신이 알리바바의 기업 가치관에도 담겼다.
2001년 창업 당시 알리바바 기업 가치관은 9가지로 요약된다. 고객제일·협업·교수학습·품질·간단명료·열정·개방·혁신·집중이 그것이다. 이를 '독고구검(獨孤九劍)'이라고 불렀다. 진융의 소설 '소오강호'에서 무림의 숨은 고수 풍청양이 주인공 영호충에게 전수해 준 검법이다.
이어 2004년에는 기업 가치관을 고객제일·팀워크·변화 수용·성실·열정·책임감 등 여섯 가지로 묶어서 '육맥신검(六脉神剑, 천룡팔부에 등장하는 고수들의 최상급 무공)'이라고 바꾼다.
그리고 2019년 9월 '신(新)육맥신검'으로 또 변화를 시도한다. ▲고객 제일, 직원 두 번째, 주주 세 번째 ▲신뢰하기에 단순하다 ▲변화는 유일한 불변이다 ▲오늘 이룬 최고의 성과가 내일의 최저 기준이다 ▲지금 이순간 내가 주인공이다 ▲성실하게 살고 즐겁게 일한다가 그것이다.
알리의 냄새···결국 '구호'뿐이었나
알리바바의 기업문화·가치관은 직원들 사이에서 알리의 냄새, 중국어로 '알리월(阿裏味兒)'이라 불린다. 알리바바의 신규 직원 채용 면접장에는 면접자가 알리바바의 기업문화와 맞는지를 살펴보는 '문미관(聞味官, 냄새 맡는 관리)'이 참석한다. 문미관은 알리의 냄새를 만드는 사람이다.
알리바바는 연말 직원 평가에서도 가치관의 비중을 절반으로 둔다. 가치관 평가에서 가장 낮은 C등급을 맞으면 아무리 다른 펑가항목이 A나 B라도 연봉 인상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그런데 이번 807사건을 계기로 알리의 냄새는 결국 구호뿐이었고, 실제 기업 내에서 실천되지 못했던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실 중국에는 기업문화를 소홀히 여기는 기업도 적지 않다. 제일재경일보에 따르면 중국 본토 증시 4000여개 상장사 중 기업사회책임 보고서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보고서를 발표하는 곳은 전체의 3분의1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