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는 그런 당혹스러움의 표현을 ‘대통령 한마디에 검찰 설익은 영장청구’라며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처럼 화살을 돌리기도 했다. 일개 비리사범 하나 구속시키는데 대통령의 지시가까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 자체가 기가 차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취재가 설익었다는 점은 반성하지 않고 그저 남의 탓만 하려는 언론의 고질병이 또 도진 것 같아 매우 씁쓸했다.
▲ 기각 가능성 높았던 김만배 구속영장
사실 김만배 머니투데이 前부국장에 대한 구속영장의 기각은 예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김씨를 잡아넣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호들갑떨던 일부 언론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상당수 법조계 인사들은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아니라, 이미 영장이 발부된 유동규 前성남도시개발공사 국장이 구속적부심을 신청할 상황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유 前국장의 구속사유 중 김 前부국장이 수표로 전달했다던 뇌물 4억원이 엉뚱하게 남욱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도주해 오늘 아침에야 귀국한 남 변호사의 텅빈 사무실에서 그 수표가 발견됐다는 것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유동규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당연히 유씨의 입장에서는 나머지 돈의 출처와 수수사유 등에 대한 소명 역시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니, 구속적부심을 청구할 사유와 근거가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당연히 김만배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될 가능성도 높게 봐야 했다. 적어도 당연히 발부될 것처럼 기사를 써서는 안됐다. 기각이 된다고 해도 ‘설익은 수사’ 운운할 상황도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수사가 진척이 됐기 때문에 기각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설익은 수사’ 운운한 것 자체가 오보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 계좌추적, 왜 안하나?
물론 ‘설익은 수사’를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처럼 거액의 돈이 얽혀있는 사건은 돈의 흐름을 쫓아야 수사가 된다. 당연히 계좌추적은 필수다. 계좌추적을 통해 누구에게서 돈이 나와 어디로 흘러갔는지, 어디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른바 '불법자금의 저수지'를 확인하라는 것인데, 희안하게도 지금까지 검찰은 이번 사건에서 ‘돈의 흐름’에 대해 추적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경찰이 신청한 계좌추적 영장을 기각하기도 했다. 오로지 정영학 회계사의 진술과 19개의 ‘녹취록’만 붙잡고 있을 뿐인데, 귀국하기 전까지 남욱 변호사와 전화로도 진술을 받아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물증을 찾는 ‘계좌추적’ 대신 오직 공범들의 진술만으로 가지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 회계사와 남 변호사는 ‘녹취록’을 적절히 풀어가면서 방송과 신문을 적절히 활용하는 프로급의 ‘언론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어제까지 미국에 도피해 있는 남 변호사는 방송 인터뷰를 자청하듯 나와 자기 입장을 강변하는 등 자신과 정 회계사의 ‘언론플레이’에 검찰과 여론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잔뜩 고무된 듯한 행동을 보였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슬쩍만 봐도 이번 사건이 남욱-정영학을 한 묶음으로 하는 세력과 김만배-유동규를 한묶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이권 다툼이란걸 알거다. 김만배가 정관계에 뿌린 자금을 누구의 자금으로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다툼을 벌인 것으로 보이는데 남욱 쪽도 로비를 안했을 거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만배쪽 비용까지 떠안고 싶진 않았을성 싶다.
지금에야 김만배가 로비한 사람들만 나오고 있지만, 남욱이나 정영학 회계사도 분명 만만찮았을 거다. 그들의 이력을 보면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여하튼, 누가 뭘했는지를 알려면 돈의 흐름을 쫓아야 하고, 그러려면 계좌추적이 선행되야 한다. 하지만 검찰은 경찰이 신청한 계좌추적 영장 마저 기각해 버렸다. 오직 정영학의 녹취록만 들고 '그분'이라는 3인칭 대명사를 흘리며 은근히 '이재명 뒷배설'을 애드벌룬 처럼 띄우고 있을 뿐이다.
검찰의 속마음이야 다 알 수 없지만, 다분히 불순한 의도를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계좌추적 결과라는 물증없는 녹취록과 진술로는 공소유지가 어렵다는 것은 검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사를 대충하고 있는데도 정 회계사와 남 변호사가 알아서 인터뷰를 하네, 녹취록을 뿌리네 하며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고, 심지어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통령 후보로 화살이 쏠리게 했으니 남는 장사였던 것 같다.
미숙한 기자들의 ‘단독 아닌. 단독 같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도 검찰의 이런 태도를 부추켰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했다. 그러는 와중에 무너지고 있는 것은 검찰에 대한 신뢰이고, 검찰에 수사권을 남겨줘야하는 당위성이다. 쉽게 말해, 제살 깍아 먹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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