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역은 다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해졌다. 전 세계의 소비와 생산을 양분하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초기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생산망이 타격을 입으면서, 안정적 공급망 확보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여기에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빠른 기술적 진보, 불평등 심화와 기후변화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경제 지형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한 글로벌밸류체인(GVC) 시스템은 2009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호황을 맞았다.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단계가 분화하고, 각 단계의 생산은 비용 우위에 있는 국가가 맡아 가치를 생산하는 GVC는 글로벌 기업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고 상호 무역의 규모를 키웠다. 그러나 이후 서서히 세계화의 역풍이 불고, 보호무역주의가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GVC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 첨단 기술을 비롯해 의료·의약 산업에 대한 보호주의 흐름은 글로벌 생산망에 대한 불신을 가속화했다. 특히 2019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수많은 기업들은 허를 찔렸다. 싱크탱크인 '이코노미스트 임팩트'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의 고위 공급망 및 조달 임원 응답자의 45%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가 공급망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이어 글로벌 사이버 공격(36%), 주요 원자재 가격 변동(33%), 기준 및 규제 차이(32%), 환경 규제 강화(29%) 등도 상위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과거의 세계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효율성이었다. 그러나 세계 무역이 복잡해지면서 회복력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이코노미스트 임팩트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60%가 넘는 이들이 공급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잉생산과 회복력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속도와 효용성이라고 답한 응답자(32%)에 비해 2배 가까이 되는 것이다.
결국 '제시간에 맞추는 것'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능력을 더욱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임팩트의 존 퍼거슨은 "모든 이들은 탄력적 공급망을 원한다"면서 "정부와 기업이 모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공급망이 충격을 버티는 것이고, 만약 충격을 받았을 경우 얼마나 빨리 회복하는지 여부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많은 기업이 공급망을 지역화하고 다양화하며 탄력성과 효율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국제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다양할 경우 회복력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환경에서 충격은 더욱 자주, 큰 강도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효용성보다는 '만약의 경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장은 비용이 많이 들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4월 비타 자보치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은 기업들의 생산 방식을 영원히 바꿀 것이다"라고 진단한 바 있다. 그는 세계화의 기반이 됐던 GVC는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다. 앞서 미·중 무역전쟁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GVC는 전쟁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코로나19 사태를 맞았다.
코로나19가 처음 창궐했던 중국 후베이성이 글로벌 생산체인의 허브 중 하나였다는 점은 전 세계 제조업에 충격을 더욱 키웠다. 중국 국내총생산의 무려 4.5%를 차지하고 있는 후베이성에는 글로벌 상위 500개 기업 중 300개 기업이 관련 시설을 두었다.
자보치키 교수는 "효율성만을 추구하던 기업들은 '플랜 B'가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지속해왔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많은 회사들은 자신들에게 부품을 제공하는 2~3차 벤더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재고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효율성에 기대 '비상사태'에 대비하지 못했던 기업들은 이제 단순히 저임금·저비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안정성'을 기반으로 생산체인을 고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특정기업 혹은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지정학적 리스크, 무역정책의 변화 등 다양한 부분을 고려해 생산 거점 다양화에 나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너지는 공급망···"리쇼어링만이 답은 아냐"
코로나19 초기에는 생산망 충격에 대한 대응으로 다시 국내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이른바 리쇼어링 담론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기술 발달에 따른 자동화는 리쇼어링을 가능케 하는 중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예전에는 기업들의 투자 리스트에 없었던 국가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독일 뮌헨대학교 국제경제학과장인 달리아 마린 교수는 유명인사의 기고 전문 매체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를 통해 " 중국의 인건비 상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무역전쟁, 로봇공학의 발달, 생산시스템의 자동화, 3D 프린팅의 진보 등 여러 변화의 영향으로 GVC가 위축됐다"면서 "향후 GVC의 변화는 로봇 산업의 발달과 함께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화의 6가지 얼굴'이라는 책을 공동 저술한 니컬러스 램프 퀸스대학 교수는 세계화는 더는 한 가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램프 교수는 세계화는 이어질 수 있지만, 양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팬데믹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원력이 될 것이다"라면서 "우리가 보게 될 것은 효율성, 시간을 맞추는 공급망, 전문화의 이익과 탄력성의 가치 간 균형을 맞추는 세계화의 더욱 균형 잡힌 형태다"라고 지적했다. 즉 싸고 빠른 공급보다는 안정적이고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공급망 확보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램프 교수는 최근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온쇼오링(onshoring) 혹은 리쇼어링 열풍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국내 생산에만 집중하는 것에도 위험성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로 외부와의 단절이 가속화한 영국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민자들이 급격히 줄면서 영국은 최근 트럭운전사 부족으로 물류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결국 문제는 분산이라고 램프 교수는 주장한다. 국내든 국외든 어느 한곳에 집중하는 것은 회복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공급망을 안정화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물건의 생산을 자국 내에서 한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경직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노동 비용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생산성을 고려해볼 때 모든 나라가 반도체 공장을 자국 내에 짓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 때문에 전문가들은 글로벌 무역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기업이 안심하고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글로벌 분업체계가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우리가 공급 체인의 회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세계 무역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라면서 "각국 정부는 이런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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