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최고령 MC 송해가 말하는 장수하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오래 일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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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이 객원기자
입력 2021-11-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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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일요일이면 항상 전국노래자랑을 챙겨봤다. 그때마다 MC 송해의 재치있는 입담과 진행이 눈에 띄었다. 그를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장수의 아이콘이다. 그는 활동 초기 좌절감으로 남산에서 몸을 던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고, 1986년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큰 슬픔을 가슴에 묻었다. 평생 그리워하며 고독한 삶을 살았다. 그의 웃음과 재치는 외로움과 슬픔 곳에서 피어난 것이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덜려온 송해를 만났다. 


 

[사진= 김호이 기자/ 최고령 MC 송해]



Q. 스크린 주연으로서 본인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잖아요. 완성본을 보셨을 때 굉장히 남달랐을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A. 제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영화가 과연 저한테 무엇을 줄까 해서 굉장히 심사숙고 하면서 봤어요. 근데 어느순간 저도 모르게 한 없이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장면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당황하면서 봤어요. 제가 본 영화 화면으로서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미안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많은 제작진 분들과 합을 맞췄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궁금해 하면서 봤어요(하하),

Q. 선생님의 삶을 다룬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의 심정이 어땠나요?

A.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거 못합니다’라고 했어요. 저희들은 내 연기를 하면서 공연에 집중하고 방송을 통해서 여러분들과 만나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서 마다 했어요. 근데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룩하려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제작하시는 분께서 꼭 제작을 해야 되는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냐고 했더니 아버님께서 저에 대한 열렬한 팬이라는 거예요. 아드님께서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니까, “송해 씨 영화를 만드는 거 어떠냐”라는 말씀을 하셨대요. 저를 통해서 부자지간에 얘기가 통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했죠.

 

[사진= 김호이 기자]



Q. 30년 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을 떠난 아들의 노래를 듣고, 30년 만에 아들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감정은 어땠나요?

A. 아들이 예술계로 나간다고 했을 때 몹시 나무랬어요. 그래서 마음으로만 간직하고 실천하지는 못했어요. 근데 동생이 오빠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허락을 하지 않지만 오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제가 조금 지나치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난 후 자식이 바라는 걸 파악을 해야 되는데 그걸 파악을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했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막내딸이 간직한 아들의 작품을 저는 존재 조차 몰랐어요. 그걸로 인해서 답답했던 부자지간의 관계도 안 좋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와서 아들을 원망한다면 ‘이녀석아, 그러면 작품을 가져와서 “아버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얘기 한마디 하지’ 자격 없는 아버지로서 대단히 후회가 컸어요. 그 목소리는 아버지 몰래해서 자신이 없이 해서 그런지 마냥 떨리는 목소리였고 전해주는 가사를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그 아이의 마음이 약해져 가는 걸 미리 짐작을 못했어요.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아들이 한남대교에서 사고가 났는데 그 후로는 제가 한남대교를 건너가지 못했어요. 일부러 돌아가고, 자식 잃은 아빠로서 몹시 마음이 아팠어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가족의 행복이란 뭘까요?

A. 가족의 행복이란 뭐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살아가면서 앞으로 하고자 하는 걸 잘 파악해서 밀어줘야 되는 의무가 있고 자식은 부모님한테 자기의 앞날에 하고자 하는 걸 알아듣게 말해서 소통이 됐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Q. 전국노래자랑을 통해서 전국민과 소통을 하다가 코로나19로 인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가 없어져서 많이 아쉬울 것 같아요.

A. 4년 정도 있으면 100년을 사는 사람이 됐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나 싶어요. 어려움을 겪고 나면 새로운 것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데 백세를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코로나는 처음이에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아픔이 후세까지 이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코로나로 인해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걸 보면서 후세대에게 희망의 길이 열리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절망만 할 게 아니라 후에는 노력의 기쁨이 올 거예요. 저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진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위로를 해드리고 어떻게 하면 소통을 할 수 있게 할까 했는데, 전국노래자랑이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됐고, 그러면서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많은 별명을 가지고 계신데요. 국민MC, 일요일의 남자, 영원한 오빠, 살아있는 근현대사 중에서 좋아하는 별명이 있나요?
A. 영원한 오빠가 제일 좋죠(웃음). 제가 받아들이기도 편안하고요(하하). 전국노래자랑 출연자 중에서 최연소자가 만 3세고, 최고령자가 115세 되신 할머니셨는데 세대를 넘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해온 만큼 저는 ‘영원한 오빠’로 불리고 싶어요.

Q. 전국 OO자랑에서 OO에 뭘 채우고 싶은가요?
A. 전국 송해 1927 개봉 자랑!

Q. 송해 선생님께서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현업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데요. 긴 세월동안 아쉽고 안타까웠던 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돌아봤을 때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요? 그걸 어떻게 극복했나요?


A. 월남을 해서 어렵게 어렵게 소질과 희망을 찾아다니기도 한 없이 마음이 아팠고 유랑극단을 거쳐서 아픔을 많이 딛고 또 다시 희망을 심었기 때문에 그게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살아가는 상황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건강을 해치게 돼서 건강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고 나와서 마음을 추스르려고 하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남산 팔각정에 올라가서 마음으로 빌고 빌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유언을 남길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에 눈 꼭 감고 내리 뛰었는데 소나무 가지에 얹혔어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갔던 순간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한창 커가고 있는 아이들한테 또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색을 안하려고 애를 썼는데 몸이 안 좋으니까, 애들한테 얘기를 할 게 없어서 마음으로만 가지고 앓으면서 재기에 재기를 이어가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잡아당겼던 게 오늘날까지 온 거죠.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선생이 전하는 메세지]


Q.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하셨는데요. 요즘 한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젊은 후배들한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나요?

A. 대중문화예술계에서 제가 제일 고령이 됐어요, 구봉서 형이 저보다 한 살 많은데 2016년에 돌아가시면서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지니까, 연예계에 무슨 일만 생기면 가슴이 철렁해요. 책임감을 느끼죠. 전국노래자랑 출신 트로트 가수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잖아요. 그런 걸 보고나면 희망이 생겨요. 침체되어 있는 분야가 있으면 제가 뛰어들어서 다시한번 인기를 끌 수 있도록 헌신을 하고 싶어요.

Q. 장수하면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뭔가요?

A. 저희들을 바라보는 분들이 없으면 저희들도 존재가치가 없어요. 공개방송을 하거나 공연을 하면 거기 오시는 분들이 재산이고 저희들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저희가 하고 있는 만사, 만원, 만행이 여러분들이 주신 거예요. 평생 그 결론이 날 때까지 저는 안갑니다.

 

[사진= 김호이 기자/ 송해 선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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