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지난해 8월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 어느 해보다 올해가 답답한 형국이다. 본인 거취도 문제지만, 그보다 미·중 패권 전쟁 속에서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경쟁사들 행보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는 독보적인 1위지만, 시스템반도체 시장 내에서는 '초격차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위기감이 크다.
실제로 시스템반도체 분야 중 핵심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는 대만 TSMC다. TSMC는 시장 2위인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기 위해 매년 과감한 투자를 예고한 상태다. 특히 올해 투자 규모가 상당하다.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에서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인 440억 달러(약 52조2000억원) 규모의 투자 집행을 예고했다. 이는 지난해 투자 규모인 300억 달러보다 상당히 불어난 액수다.
뒤늦게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도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200억 달러(약 24조원)를 투입해 미국 오하이오주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인텔은 약 1000에이커(약 4.04㎢) 부지에 첨단 반도체 공장 2개를 착공, 2025년 양산을 목표로 삼았다. 해당 용지는 총 8개 공장을 지을 수 있어 향후 인텔의 공장 설립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미 향후 10년간 1000억 달러(약 119조원)를 투자 계획도 밝힌 상태다.
그나마 지난해 8월 이 부회장이 가석방된 이후 반도체 투자에 속도가 붙은 모습이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가석방된 후 11일 만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 오는 2023년까지 3년간 반도체·바이오 등 전략 사업에 240조원을 신규 투자하고 4만명을 직접 고용할 계획이다. 이는 지난 2018년 삼성이 발표한 180조원 투자 계획을 뛰어넘는 단일 기업 사상 최대 규모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의 제2 파운드리 공장 건설 계획도 공식화했다. 이 부회장이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길에 내놓은 통 큰 대미 투자로 평가받는다.
가석방 이후 이 부회장은 나름 발 빠른 경영 행보를 이어가고 있지만, 사실 그는 '해외 출장' 한 번 가기도 힘든 처지다. 매주 목요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재판에 출석하는 이 부회장의 자유 시간은 재판 휴정기뿐이다. 때마침 다음 달 3일 재판이 휴정하면서 오는 27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 14일간 장기 출장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사면을 받았다. '경제인 사면 불허'를 고수해온 문재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이 부회장의 사면은 언감생심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권력을 휘두른 당사자(박근혜 대통령)는 사면됐지만, 정작 그의 협박에 못 이겨 청탁에 응한 피해자(이재용)는 사면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 와중에 주목되는 사람은 최태원 SK 회장이다. 그도 이 부회장처럼 '횡령·배임 혐의'로 2003년에 이어 2013년에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 모두 사면됐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과 함께 현직 총수 중 두 번의 사면을 받은 이는 최 회장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는 이명박(2008년)·박근혜(2015년) 정권에서 연달아 사면을 받은 신기록도 세웠다.
과거가 어찌 됐든 최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SK그룹은 '구성원의 행복'을 중시하는 'ESG 경영'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최 회장의 별명도 'ESG 전도사'다. 그는 특히 지난해 3월 경제단체를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도 취임했다. 4대 그룹 총수 중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경우도 그가 처음이다.
재계 1위 삼성의 총수에게도 재계 맏형인 최 회장과 같은 미래가 가능할까. 지난해 말 청와대 오찬에 앞서 최 회장의 꼬인 마스크를 다정하게 고쳐주던 이 부회장 모습을 보고, 문 대통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다음 대통령만이 그 답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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