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불황에도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올해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했던 전 세계 중앙은행이 딜레마에 빠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환율과 국제유가,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면서 경기 둔화 분위기가 급속히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기준금리를 서둘러 올려야 하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로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금리 인상에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자칫 경기 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9일 금융권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하면서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국내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0월부터 5개월 연속 3%대를 이어가면서 물가 관리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물가가 오를 경우 기업 입장에선 재료가격 상승으로 이익이 감소해 실적 악화를 초래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확산하는 이유다.
물가를 밀어올린 주된 요인은 공급망 차질과 이로 인한 국제유가 등 원자재 가격 상승이 꼽힌다.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고유가에 특히 취약한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유가 상승세는 더 가팔라지고 있다. 국제유가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된 지난 7일 130달러를 넘어섰으며 전날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장중 8% 이상 뛰기도 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미국, 유럽 등 국제사회가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취하면 국제유가가 150~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에 이르면 미국의 올해 성장률이 0.5%포인트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유가 급등이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약화하는 것은 물론, 에너지발(發) 추가 물가상승에 위축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 경기둔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원·달러 환율도 이상 신호가 감지된다. 물가 급등이 안전자산 선호심리를 부추겨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8일 원·달러 환율은 10원 가까이 급등하며 1237.0원에 거래를 마쳤다. 1230원대로 올라선 것은 2020년 5월 29일(1238.5원) 이후 1년 9개월 만이다. 금융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내다봤다. 러시아 디폴트 선언 가능성과 그 파장, 유가 급등에 따른 한국 무역 적자 기조 전환 가능성,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등 추가로 반영해야 할 요소들이 여전히 남았다는 분석이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가파른 인플레이션 상승 탓에 연준 통화 긴축 전망에 큰 변화가 없고, 미국 장·단기 금리차의 빠른 하락세는 경기 우려, 안전선호에 의한 달러 강세로 이어질 것"이라면서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각종 요인들은 달러 환율 추가 상승을 가리키는 만큼 환율 추세 반전에 대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의 올해 기준금리 인상 일정도 우크라이나 사태 전개 상황에 따른 물가 흐름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은은 물가 안정을 주된 과제로 삼고 있는데 물가가 4%대로 오를 경우 연말까지 최소 2차례 추가 금리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상만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가져올 거대한 변화는 인플레이션 장기화와 이로 인한 금리 상승 압력 강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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