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에는 일본 정부가 지원금까지 내걸고 홍보하고 있는 마이넘버카드에 의료보험증 기능을 추가해 사용할 경우, 오히려 진료비가 비싸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사안을 담당하는 디지털청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앞서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마이넘버카드 발급을 장려하며 의료보험증 기능을 추가할 경우 7500엔(약 7만3000원)가량의 포인트를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사용 편의성을 높여 이달 1일 기준 43.3% 수준에 그친 마이넘버카드 보급률을 확대하겠다는 차원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서 해당 카드를 사용할 경우 진료비가 초진시에는 21엔, 재진시에는 12엔 높아지는 것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19일 일본 디지털청 내에서도 문제 의식이 있었지만, 기득권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하면서 이러한 판단이 내려진 것으로 분석했다. 디지털 행정의 사령탑 역할을 하며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기를 바랐지만, 기존 부처들처럼 관료제에 발목이 잡혀 환자의 의료비 부담보다도 병원 측의 진료수가 인상을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일본 자문업체 그레이트져니공동회사의 야스카와 신이치로 대표는 "진료비 부담이 커진다면 환자들은 심리적으로 마이넘버카드 제도를 꺼리게 될 것"이라며 "디지털청이 최악의 판단을 내렸다"고 닛케이에 밝혔다. 이어 "결과적으로 마이넘버카드 도입률과 이용률이 모두 침체해 디지털 전쟁에서 패전했다는 상징이 될 수 있다"며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크게 비난받는 지점이 될 것"이라며 디지털청의 부족한 성과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역시 스가 전 총리에 이어 디지털 개혁을 다짐했다. 지난 1월 정기국회 개회식의 시정방침 연설에서 기시다 총리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를 재차 강조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개혁과 과학기술 분야 등을 ‘성장의 엔진’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부 외에 민간에서도 디지털 개혁 필요성을 주창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단체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지난 15일 디지털청을 방문해 작년 11월 기시다 후미오 총리 주도로 구성된 '디지털 임시 행정조사회'에 디지털 개혁·규제 개혁·행정 개혁과 관련한 제언을 제출했다. 게이단렌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 디지털 개혁이 필수적이라며, 민간에서도 디지털청을 중심으로 한 관계 부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왔다.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을 위해서는 각종 행정 수속을 비롯해 의료,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규제를 개혁하고 디지털화를 진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디지털청이 성과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는 일본 특유의 관료주의가 지목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유연한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기존 공직 사회와 발을 맞추는 과정에서 다시 보고서와 회의의 늪에 빠진 채 혁신의 길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닛케이에 따르면 당초 디지털청은 프로젝트마다 팀을 짜서 활동한다는 유연한 조직 구조로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직원들 모두가 여러 팀을 겸직하게 되고, 책임 분담 역시 모호해지며 직원들 간 업무와 정보를 공유하기는 어려워졌다.
지난해 말에는 디지털청에서 일하고 있던 기존 직원들 10명 가까이가 일제히 퇴직해 대기업이나 외국계 컨설팅업체로 이직하기도 했다. 사안에 정통한 중견 디지털청 직원은 "모두 우수한 직원이었지만 여기 있어도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분석했다. 공직자 출신의 직원 역시 "회의가 너무 많고, 비슷한 서류를 몇 번이나 만들고 있다"며 "다른 관공서와 비교해도 이상할 정도로 쓸모없는 업무가 많다"고 평가했다.
일본 내 기업들이 디지털청과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대신 미국 등 해외 대기업의 서비스만 선호하는 것 역시 관계자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지난해 10월 디지털청은 행정용 시스템을 위한 클라우드 공모에서 세계 최대 클라우드 기업인 미국 아마존웹서비스(AWS)에 맞춘 요구사항을 내세우며 빈축을 샀다. 일본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자 운영해 온 시스템을 통일하기 위한 주력 사업에서 노골적으로 해외 기업의 손을 들어준 모양새다.
미국의 AWS·마이크로소프트·구글 등 대기업들이 세계 클라우드 시장의 3분의2를 점령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기업들의 위상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여러 정부 사업을 진행해 온 국내 업체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닛케이는 디지털청이 요구하는 요건에 AWS 특유의 표현이 나열되며 마치 AWS의 발표 자료를 가져온 것 같았다고 지적했다. 마키시마 카렌 디지털상은 "최고 수준의 보안 확보가 기준이 되었다"고 강조했지만, 한 IT 기업 담당자는 AWS와 구글 2곳이 공모에서 선정된 가운데 "결국 아마존을 뽑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미 관청 등의 행정 시스템을 담당해 본 국내 업체들이 있었지만, 요건을 채우지 못해 미국 기업들과의 경쟁을 시도하지도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유엔의 세계 전자정부 순위에서 지난 2018년 10위를 기록했던 일본의 순위는 2020년에는 14위까지 하락했다. 일본 내에서도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고위 임원들은 메일로 보고받는 대신 마이크로소프트 팀즈 등 기업용 협업 플랫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관료제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 중 일부다. 백신접종증명서를 담은 어플리케이션 같은 경우에는 개발 시간을 크게 단축하는 데 성공하며 3개월 만에 도입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디지털 개혁이 성공하기까지는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성공 사례가 필요할 전망이다. 일본 디지털청이 아날로그 일본을 디지털 일본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는 대신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 부처들도, 어지러운 지휘 체계에 의문과 반감을 품는 민간 기업들도 설득해야 한다. 닛케이는 "디지털청은 대담하고 신속한 디지털 개혁을 내세우고 있지만, 구호만 무성하면 일본은 세계 경쟁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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