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34) 호찌민의 "더불어 정신"이 나라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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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전 조선대교수
입력 2022-05-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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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한국글로벌학교(KGS)이사장]


베트남에서는 모두 끝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는데, 유일하게 호찌민 주석만 성(姓)으로 부른다. 베트남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는 5월 19일이면 호찌민 탄생 132주년이 된다. 베트남 민족의 영원한 큰아버지인 호찌민은 1890년에 태어나 나이 11살 때 응우옌떳타인(阮必成)이란 이름으로 처음 개명하여 1969년 9월 2일 79세로 서거하기까지 모두 174개의 가명과 필명을 사용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프랑스 식민당국의 체포를 피하려고 수시로 이름을 바꿔 사용했기 때문이다. 호찌민은 21살 때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한 지 30년만인 1941년 음력 설에 까오방(Cao Bằng)성으로 귀국하여 중국 접경지역의 빡보 동굴에 혁명 전초기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1945년 발생한 8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 9월 2일 독립선언과 동시에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호찌민 주석이 까오방성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 설치함으로써 까오방성은 혁명의 역사적인 유산을 간직하게 되었다. 까오방시에서 북쪽으로 52km 떨어져 있는 빡보(Pác Bó) 동굴은 베트남 국가 특별유적지로 지정되었고, 동굴은 꼭보(Cốc Bó) 동굴이라고도 한다. 빡보(Pác Bó)와 꼭보(Cốc Bó)라는 의미는 이 지역 소수민족 언어인 따이-눙(Tày-Nùng)어로 ‘시원(始原)’, ‘발원(發源)’이라는 뜻이다. 호찌민 주석이 빡보에 와서 혁명의 전진기지를 구축함으로써 말 그대로 빡보가 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에서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호찌민은 자신의 민족주의적인 야망인 독립운동을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을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배하에서 독립 세력을 구축하는 일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21세의 청년 응우옌떳타인은 1911년 6월 5일 사이공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 <아미랄 라뚜쉬 뜨레빌>호의 보조 요리사로 승선하여 프랑스로 갔다. 이때부터 30년간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1년 1월 28일 귀국하여 빡보에 베트남 혁명 전초기지를 구축하였다. 이곳에서 호찌민이 혁명을 진두지휘하였기에 그의 발자취가 닿은 곳곳이 역사의 전적지가 되었다. 호찌민은 자신이 직접 명명한 ‘레닌 천(川)’에서 낚시를 하며, 물이 벽옥처럼 푸른 ‘레닌 천’이 감도는 ‘칼 맑스 산(山)’을 산보하며 혁명을 구상했다.

 

[레닌 천(川)에 호 주석이 앉아서 낚시를 했던 바위]


빡보 동굴 지휘소에는 호찌민이 당시 사용하던 돌 탁자, 추위를 피하기 위한 화로, 나무 침대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고, 레닌천 옆에는 호찌민 주석이 앉아 낚시하던 바위가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동굴은 면적이 80㎡ 정도로 협소하며, 동굴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입구에는 호찌민 주석이 직접 바위에 새겨 놓은 “8/2/1941” 이란 날짜가 있다. 이 동굴에 입주해서 생활하기 시작한 시점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동굴의 명칭은 정확히 말하면, 빡보 지역에 있는 꼭보(Cốc Bó) 동굴이 맞는데, 모두 통용이 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빡보 동굴 내부는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바위 동굴일 뿐이다. 냉기가 도는 동굴에서 화롯불을 피우고 허기를 달래며 독립을 구상하였다. 그는 1945년 9월 2일 나라를 세우고 24년간 주석으로 재임하면서 내내 국민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입고 먹고 마셨다.

 

[꼭보 동굴 입구]


빡보를 찾는 사람들은 베트남 혁명과 호찌민 주석의 활동기에 중요한 시기를 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 같은 절경을 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이곳에 오면 왜 호찌민 주석은 다른 지역이 아닌 이곳을 혁명의 전초 기지로 선택한 이유를 알게 된다. 호찌민은 귀국 후 머물 곳으로 3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첫째가 라오까이(Lào Cai)지역, 둘째가 동당–랑선(Đồng Đăng - Lạng Sơn)지역, 셋째가 까오방(Cao Bằng) 지역이었다. 1940년말 중앙당에서는 풍찌끼엔(Phùng Chí Kiên), 호앙반투(Hoàng Văn Thụ) 그리고 당반깟(Đặng Văn Cát) 모두 3명을 선발하여 까오방으로 보냈다. 현지의 혁명운동 분위기를 살펴보고 나서 이들을 해외로 보내 호찌민 주석을 모셔오도록 했다. 호앙반투로부터 빡보의 산세, 까오방 지방의 혁명 분위기, 국제 정세에 대한 국내 분위기를 보고를 받은 호찌민은 까오방이 혁명을 전개하는 전진기지로 적지라고 판단하고 이곳을 택했다. 그리고 직접 노를 저어 베트남식 쪽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쪽배로 비밀리에 오고 갈 수 있고 은폐와 엄폐, 기도비닉(企圖秘匿)하는 데 최적지였다. 지리적으로는 중국 국경에 접해 있어 비상시에는 중국으로의 탈출이 용이하고, 중국에 있는 베트남 독립 세력과의 연대가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그리고 평생을 생활의 편리함이나 음식 사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국민과 함께 고난도 기쁨도 늘 함께 나눴다.
 
UNESCO는 1990년 호찌민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호찌민을 “베트남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문화인”으로 공인하였다. 호찌민은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국민은 항상 “함께, 더불어”의 대상이었다. 그의 철학은 국민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바(3) 꿍(함께, 더불어) 정신”이다. 호찌민 주석의 일대기는 바로 현대 베트남의 역사이고, 베트남을 움직이는 힘이 바로 호찌민 사상이다. 까오방성에 남아있는 세기의 위인 호찌민 주석의 발자취는 독립투쟁과 8월 혁명 역사 교실로 남아 생생한 베트남 독립투쟁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게 될 것이다. 국민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국가 지도자의 정신이 적수공권의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키고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빡보는 말한다.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하고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대상이라고. “바(3) 꿍(함께, 더불어) 정신”이 나라를 독립시키고 통일을 달성케 한 것이라고. 베트남 민족의 표상인 호찌민 주석의 “더불어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한‧베 교류 활성화와 협력관계를 진작시키는 첩경이다. 금년은 한‧베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호찌민(1890.5.19-1969.9.2)]



안경환 필자 주요 이력

▷한국글로벌학교(KGS) 이사장 ▷하노이 명예시민 ▷전 조선대 교수 ▷전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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