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신약 후보물질 연구개발 전문 기업인 보로노이는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진행했다. 보로노이는 IPO 재수생이다. 지난 3월 '유니콘 상장 1호'란 타이틀로 증시의 문을 두드렸지만 높은 기업가치와 금리 인상 분위기로 인해 실망스러운 수요예측 결과를 받았고, 결국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이후 △공모 금액 △유통 가능 물량 △공모가 밴드 △할인율 △추정 순이익 등 공모가격 및 단기적 수급에 영향을 주는 사항들을 중심으로 신규 투자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조건을 변경했다. 상장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금리 인상 시즌이 본격화되면서 IPO는 본격 한파를 맞이했다. 올해 들어 현대엔지니어링을 시작으로 원스토어, 태림페이퍼, SK쉴더스 등 대어급들도 상장을 잇따라 철회했다. 기대를 모았던 신재생에너지 토털솔루션 기업인 대명에너지 역시 조건을 신규 투자자에게 대폭 유리하게 변경한 이후 재수 끝에 증시 입성에 성공했다.
기업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치는 금리 인상
금리 인상의 여파는 기업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선 조달금리가 높아진다. 기업들은 자기자본과 타인자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타인자본은 남에게 자금을 빌리기 때문에 이자가 발생한다. 회사는 영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이자 부담이 커질수록 수익성이 좋은 회사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 자기자본은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다. 주주는 기업의 가치가 높아지고, 향후 배당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IPO 등 유상증자로 자금을 조달한다면 기업은 자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금리 인상기일수록 그 효과는 배가 된다. 그런데 주주들 역시 자기자본으로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주주들이 조달할 수 있는 자금도 감소하게 돼 기업들의 자기자본 조달 난이도는 높아진다.
또한 밸류에이션을 제대로 인정받기도 어렵다. 금리가 인상된다면 사업적인 측면에서나, 미래가치추정(할인율) 측면에서 불리하다. 미래가치 추정은 상대적 평가방식과 절대적 평가방식을 함께 사용한다. 국내 증시가 지난해 3300포인트를 정점으로 2600포인트까지 20%가량 하락하면서 비교대상 기업들의 기업가치는 대부분 하락했다.
절대가치도 마찬가지다. 절대가치는 일반적으로 현금흐름할인법(DCF)을 활용한다. 기업의 미래 현금흐름을 현재로 끌고 와 가치를 평가한다. 이때 가중평균자본비용(WACC)을 활용해 할인하는 방식으로 미래의 가치를 현재로 갖고 온다. 그런데 금리가 인상되면 할인율이 높아진다. 백화점에서 바겐세일을 하면 상품의 가격이 낮아지는 것처럼 기업의 미래가치도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바이오기업이나 이커머스 등 고부가가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은 할인 폭이 크다. 향후 변수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현재 스마트폰은 정전기방식으로 터치를 인식한다. 이 방식이 보편화되기 전에 누르는 강도에 따라 인식되는 압력식도 일부 사용됐다. 하지만 이젠 쓰이지 않는다. 압력식 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가치는 크게 줄어들게 됐다. 기술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변동폭이 크다 보니 할인 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
천정부지로 올라간 비상장기업 기업가치
보통 비상장기업이 상장을 하면 기존 투자자들은 큰 이익을 본다. 하지만 보로노이의 경우 모든 주주가 그렇지 못하다 보니 상장 결정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016년부터 5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투자를 받았는데, 마지막 단계에 참여한 투자자는 기업가치 1조2000억원을 인정하고, 주당 12만원 이상으로 주식을 매입했다. 그런데 지난 3월 결정된 희망공모가 기준으로 시가총액은 6700억~8700억원이었다. '반값 세일' 수준이었다. 이번 시도는 여기에서 30% 더 할인했다. 대형마트 신선신품 코너에서 마감 전에 한 번 더 세일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존의 상장들과는 크게 다른 풍경이다. 지난해까지 '대어급' 기업이 상장할 때 수요예측이나 청약 경쟁률은 1000대 1을 쉽게 웃돌았다. 중개를 하는 증권사들은 고객들에게 증권계좌 가입을 유도할 수 있었고 일부 증권사는 수수료도 쉽게 요구했다.
통화정책+금융정책, '스타트업'의 리조트化
IPO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것은 금리 인상의 영향이 크다. 그런데 금리 인상은 선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 같은 온도차는 비상장기업들의 가치가 조정을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 운용사(PE) 등에 자금이 많이 흘러들어갔고 기관투자자들은 높은 기업 가치를 인정했다.
VC나 PE들도 무한정 자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투자가 이뤄질 수 있는 배경에는 정부란 든든한 배경이 있다. 바이오,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들은 '혁신'기업으로 분류된다. 정부가 키워나가는 곳이다 보니 정책 자금 출자가 몰리고 있다. 2016년 총 2조1000억원 수준이던 벤처 투자 자금은 지난해 7조6800억원까지 증가했다. 5년 새 3배가 넘게 증가한 것이다. 수급의 원리에 따라 돈이 몰리면 자연스레 기업가치는 오를 수밖에 없다. 같은 기간 동안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신생 기업을 의미하는 유니콘 기업은 국내 3곳에서 18곳으로 증가했다.
유니콘 투자자들은 상장으로 자금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국내 증시는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가치도 내려갔다. 하지만 비상장기업들의 상황은 다르다. 자금은 여전히 수혈되고 있으니 가치가 줄어드는 게 더욱 어렵다. 감소한 가치로 펀딩해 투자자들에게 평가 손실을 확정 지으려는 기업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개인투자자들도 손쉽게 비상장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 성장 집합투자기구'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상장 기업들에는 금리 인상이란 세찬 비바람이 불고 있는데 스타트업은 정부가 제공한 리조트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리조트에서 나와 금리 인상이란 현실과 맞닥뜨린다면 '바겐세일'은 불가피하게 된다.
황보창 한국기업평가 연구원은 "완화된 통화정책은 대차대조표를 왜곡하고 자산 버블을 무한히 재생산할 수 있다"면서 "자산의 버블은 자본을 증가시키고 자산 또는 기업의 신용도를 왜곡시킨다"고 말했다. 이어 "왜곡된 자본과 신용도로 더 많은 부채를 조달할 수 있으면, 늘어난 부채는 다시 자산 버블을 양산한다"면서 "이러한 과정은 장기 저금리 상태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