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입 정시모집에서 비수도권 대학 26개 학과에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시에서 선발한 신입생 수는 수도권 대학이 지방대보다 1만명 이상 적었지만 지원자 수는 수도권 대학이 8만명 가까이 많았다. 지원자가 적어 사실상 미달인 지방대로 적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전라·경상 지역에서 특히 두드려졌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속설이 점차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신입생이 없다···51개 지방대 정원 미달
7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정시 최종 경쟁률을 공개한 전국 208개 대학 중 14곳 26개 학과에서 지원자가 0명으로 집계됐다. 2020학년도에 3곳에 불과했던 지원자 0명 학과는 2021학년도 5곳, 2022학년도 23곳 등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정시 지원자가 없는 학과는 인문계열이 16곳으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 역시 2020학년도 3곳, 2021학년도 4곳, 2022학년도 14곳, 올해 16곳으로 증가세를 이어갔다. 자연계열은 2020학년도에는 없었지만 2021학년도 1곳, 2022학년도 9곳, 올해는 10곳으로 크게 늘었다.
인문계열 A대학 항공 관련 학과는 정시로 33명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27명을 모집한 B대학 관광 관련 학과도 마찬가지다. 자연계열인 C대학 에너지 관련 학과는 64명을 모집했지만 정시 지원자는 전무했다.
개설 학과에 정시 지원자가 한 명도 없는 대학도 급증했다. 2020학년도엔 3곳뿐이었지만 올해는 14곳으로 3배 이상 늘었다. 지원자 수 0명을 기록한 대학은 모두 지방대였다. 경북 지역 대학이 10개 학과로 가장 많고 경남·전남(각 4개), 부산·충남·충북(각 2개), 강원·전북(각 1개)이 뒤를 이었다. 반면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과 세종 지역 대학에는 지원자 0명인 학과가 없었다. 대전·대구·광주·울산·제주 역시 마찬가지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정시 지원자가 0명인 것은 대학이 선발 능력을 상실한 것"이라며 "지원자가 없는 학과는 기대 이상으로 증가할 수 있고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정원은 채웠지만 사실상 미달인 지방대도 많다. 정시는 군별로 3번 지원할 수 있는데 경쟁률이 3대 1보다 낮으면 미달로 본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경쟁률을 공개한 전국 188개 대학 중 올해 정시 경쟁률이 3대 1을 밑도는 대학은 총 68곳(35.2%). 이 가운데 86%(59곳)가 지방대다. 대학 수만 보면 지난해 64곳에서 59곳으로 줄었지만 비율은 지난해(83.1%)보다 높다.
경쟁률이 1대 1에도 못 미치는 대학은 총 15곳이었으며 이 중 14곳이 지방대다. 반면 3대 1 미만인 서울권 대학은 지난해 8곳(10.4%)에서 올해는 4곳(5.9%)으로 줄었다.
미달 사태는 전라·경상권에서 특히 심각했다. 유웨이에 따르면 정시 경쟁률이 3대 1을 밑도는 지역은 전남(2대 1)과 전북(2.8대 1), 경북(2.65대 1), 경남(2.8대 1)이다. 전남 지역은 모집 인원을 줄였는데도 지원자가 전년보다 25.3%, 전북은 19.7% 감소하며 경쟁률이 추락했다. 국립대인 목포대 경쟁률은 1.8대 1, 군산대는 1.74대 1에 그쳤다.
광주(3.01대 1)와 강원(3.27대 1), 부산(3.31대 1)은 3대 1을 겨우 넘어섰다. 이에 비해 수도권인 서울(5.74대 1)과 경기(6.21대 1), 인천(6.05대 1)은 전국 평균(4.6대 1)을 웃돌았다.
임 대표는 "정부가 관련 대응책을 적극적으로 발표하는 것과 달리 현실에서 정책 효과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지방 국립대도 지원자 '뚝'···지방대 의대도 이탈 가속
지역인재 양성을 책임지는 지방거점국립대(지거국)도 이런 현상을 피하지 못했다. 유웨이 자료를 보면 올해 지거국 9개교 정시 평균 경쟁률은 4.68대 1로 지난해 4.73대 1보다 하락했다. 모집 인원을 1037명 축소했는데도 지원자 수(5477명)가 더 줄면서 경쟁률을 끌어내렸다.
이 역시 호남권과 경상권 지거국에서 지원자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부산대 지원자는 전년보다 1527명(18.3%) 줄며 경쟁률도 5.35대 1에서 4.1대 1로 하락했다. 전남대(4.32대1)는 지난해보다 다소 올랐지만 평균에는 못 미쳤다.
학령인구 감소는 지방대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유웨이에 따르면 올해 정시모집 지원 건수는 50만4500여 건으로 지난해 52만건보다 1만5000여 건 줄었다. 수험생 수가 줄어서다. 지역별 정시모집 규모를 보면 수도권 대학 4만9092명, 지방대 5만9366명으로 수도권 대학이 1만274명 적다. 그러나 지원자 수는 수도권 대학 28만9115명, 지방대 20만9430명으로 수도권이 7만9685명 많다. 지난해 격차가 7만3347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수도권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진 것이다. 정시 지원 건수는 모든 지역에서 전년보다 줄었지만 지방대 감소율(6.1%)이 수도권 대학(2.5%)에 견줘 세 배 가까이 높았다.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높은 지방대 의대도 이런 현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종로학원 자료를 보면 전국 38개 의대에서 2020∼2022년 중도 탈락한 의대생은 총 56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74.2%(416명)는 지방대 의대다. 중도 탈락은 자퇴·미등록·미복학·유급 등으로 졸업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중도 탈락자 대다수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의대 진학을 목표로 대입에 재도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만기 유웨이 소장은 "올해 정시 결과를 보면 지역 대학 위기가 빛의 속도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쟁률보다 지원자 수에 대학 생존권 문제가 걸려 있는 만큼 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 소멸 심각"···교육부, 지자체에 예산 권한 이양
지방대 이탈 현상이 심화하면서 정치권에서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8일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개나리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된다는 예측이 현실로 다가왔다"며 "한때는 서울 명문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지방 거점 국립대학들이 그냥 지방대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말했다. 이어 "지역 인재들이 모두 서울로 빠져나가면서 지방 소멸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우려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이달 1일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Regional Innovation System & Education·RISE)' 구축 계획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RISE는 중앙부처가 이끌던 대학 지원을 지역 주도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지역과 지방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조처다.
교육부는 2년 뒤인 2025년부터 대학 지원사업 예산 가운데 절반이 넘는 지역 대학 관련 예산 집행 권한을 17개 지자체에 넘겨 경쟁력 있는 지방대에 투자해 육성할 수 있게 한다. 각 지자체가 지역 발전 계획과 대학 특성화 분야 등을 고려해 지역 대학 지원계획(RISE 계획)을 세우면 해당 지자체와 협약을 맺은 뒤 관련 예산을 주는 방식으로 추진한다.
올해 기준 교육부에 편성된 대학 지원사업 예산은 4조4000억원이다. 예산 규모가 매년 느는 점을 고려할 때 2025년 지자체에 이관할 예산은 2조원 이상으로 추산된다. 앞서 오는 3월부터 2025년 2월까지는 시범사업을 벌인다. RISE 성공 모델을 만들고 개선점을 찾기 위해서다. 2023∼2024년 모두 5개 내외 비수도권 시도를 시범지역으로 선정할 예정이다.
지역 발전을 선도하고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글로컬 대학' 육성도 추진한다. 교육부는 올해 10개 내외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비수도권 모든 지역에 총 30개 안팎으로 글로컬 대학을 선정해 지원할 방침이다. 글로컬 대학 1개교당 5년간 1000억원을 지원한다. 각종 규제 특례 혜택도 제공한다.
윤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 "교육은 나라를 살리는 균형발전의 핵심이고, 특히 지역 대학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대학에 대한 정부 예산 권한을 지자체에 이양해 지역이 수요와 비교우위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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