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은 삼국시대부터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다. 영천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요충지로 북방에서 남진하는 적으로부터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실제로 후삼국 시대에는 견훤의 군대가 영천에서 신라군의 분전에 패퇴한 기록도 있다.
영천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예부터 영천인들은 충의(忠義)를 중요시했다. 나라가 왜적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어려움에 놓이게 되자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해 희생도 불사한 사람들이 영천인들이었다.
의기롭고 충의에 가득 찬 영천인들의 궤적(軌蹟)을 따라가 그들의 활약상을 알아보자.
임진왜란 당시 조총을 앞세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파죽지세로 부산진에 상륙해 울산 경주를 경유해 영천성을 공격해 그 당시 영천성을 수비하던 훈련 안 된 지방군인 속오군의 역부족과 그 당시 조선의 방어체계인 진관제도의 모순으로 인해 순 식간에 영천성이 함락 당했다. 그러나 영천민들은 수수방관 하고 있지만 않았다. 권응수 의병장을 비롯해 경산의 의병장 최문병 장군 및 주변의 여러 의병장이 의기투합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영천성을 탈환했다.
이 영천성 전투는 일개의 읍성을 탈환한 의미가 아니라 용인에서 왜장 와키자카에게 조선 근왕군 7만명이 패퇴해 사기가 꺽인 조선군에게는 전쟁의 양상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군의 사기를 더 높이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얼마나 영천전투가 중요했으면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징비록’에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4대 대첩에 ‘영천성 수복전투’를 꼽고 있다.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피살되자 피 끓는 애국 영천민들이 1885년 을미년에 영천을 중심으로 경상도 여러 지방에서 영천에 집결해 봉기한 의병을 ‘산남의진’이라고 부른다.
산남의진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전술적으로 앞선 일본군을 상대로 경북 동해안과 영천 일대에서 목숨을 건 무장 의병 활동을 했으나 중과 부족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우국 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의병장으로 목숨을 바친 ‘양세대장(兩世大將)이 탄생해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비록 ’산남의진‘이 미완의 의병으로 역사에 기록됐으나 산남의진은 그 무대를 간도로 옮겨 일제와 치열하게 싸워 우리 민족의 간도 무장 투쟁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의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영천시는 영천의 의병 활동과 그 중요성을 중앙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지난해 6월 11-13일 ’제12회 의병의 날‘을 개최해 그날의 의병들을 기념했으며 앞으로도 ’영천성 수복전투‘와 ’산남의진‘의 의병들을 기념하고 재평가하는 학술대회 및 기념행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꾸준히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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