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생명이 만성질환에 따른 국민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공공의료데이터를 활용해 '질병부담지수' 개발을 추진 중이지만 2년째 진척되지 않고 있다. 2021년 중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공공의료데이터 승인을 신청했지만 시민단체·의료계가 개인정보 유출 등을 이유로 이를 가로막으면서 관련 논의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험권은 한화생명 측 요청에 대한 승인 여부에 따라 개인 공공의료데이터 활용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고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심사를 받는 '을(乙)' 처지에서 건보공단 측 결정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며 울상이다.
25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한화생명은 질병부담지수 개발을 추진 중이다. 질병부담지수는 말 그대로 암, 심뇌혈관질환 등 국내 다빈도 질환이 국민 가계에 미치는 부담 수준을 평가하는 지수다. 의료비 관점에서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질병 수준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국내 의료경제 관련 학술연구와 보건의료 정책연구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문제는 해당 지수를 개발하기 위해선 공공의료데이터 활용이 필수라는 점이다. 그러나 건보공단이 해당 데이터 활용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면서 관련 작업이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다. 시민단체·의료계 등이 개인정보 유출 등을 이유로 이를 가로막자 건보공단이 장고에 들어간 것이다.
시민단체와 의료계는 공공의료데이터를 보험사에 제공하면 공보험 기능이 축소되고 보험료 할증과 가입 거절로 이어질 수 있는 등 국민의 보편적 건강권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한화생명·삼성생명·교보생명·KB생명(현 KB라이프생명)·현대해상 등은 2021년 7월 건보공단에 공공의료데이터 사용 신청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건보공단은 보험사들에 불허를 통보했다.
보험사 연구계획서 내 선행연구 검토나 연구가설이 제시되지 않는 등 과학적 연구가 미흡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학계나 공공연구소 연구진과 협업할 것을 권고했다. 이후 한화생명은 해당 내용들을 보완해 지난해 12월 신청서를 다시 제출했다. 그러나 건보공단은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등을 이유로 무기한 심의를 보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험권은 해당 논의가 장기화하면 최근 주력하고 있는 헬스케어 분야 사업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공공의료데이터는 ‘국민에게서 수집한 의료데이터'로, 보건의료 분야와 경제, 산업 연구 등을 지원하기 위해 표본연구DB(데이터베이스) 등을 가명 처리해 제공하고 있다"며 "그러나 보험사는 이를 활용하지 못해 한국인 유전형질과 생활패턴이 반영된 통계를 활용하지 못하고 해외 데이터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승인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지만 보험권에 꼭 필요한 사업이기 때문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기약 없이 승인만 기다리는 상황"이라며 "건보공단 측에 승인 검토 의견을 전달하기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개인정보 유출, 할증·가입 거절' 진짜 발생하나
보험권은 공공의료데이터 제공 시 개인정보 유출 등 부작용이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현재 공공의료데이터 이용 시 개인정보보호법령 등에 따라 △가명 조치에 활용된 추가 정보는 재식별 방지를 위해 분리 보관 △가명 조치 과정에서 재식별이 되면 처리 중지·삭제 조치 △기술적·관리적 보호 조치 의무 준수 등 엄격한 보안 관리체계하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건보공단 공공의료데이터는 가명 정보로 사전에 허가받은 연구자만 건보공단 폐쇄망을 통해 데이터 분석이 가능하다. 분석 결과값(통계값)만 반출을 할 수 있어 개인정보 유출은 불가능하다.
보험권은 시민단체 등에서 우려하는 보험료 상승과 가입 거절이 구조적으로 불가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보험업법에 따르면 보험사가 임의적·자의적으로 보험료를 산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률 적정성 검증, 신상품 신고 등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또한 보험사는 산출한 위험률을 보험개발원 등 공신력 있는 외부 기관을 통해 검증받아야 하며 신규 담보 개발은 금융감독원 신고를 거쳐야 상품화할 수 있다.
여기에 보험사가 요청하는 자료는 비식별 처리된 자료로 개인 추적과 특정이 불가능해 특정 개인의 건강 상태나 의료기관 이력 등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소비자는 보험 가입 시 필수정보(법령상 고지의무사항 : 입원, 수술, 진단 경력) 외에는 보험사에 고지할 의무가 없어 가입 거절 또는 건강 상태에 따라 할증되는 상품 개발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보험사의 데이터 활용 요구는 국민 의료비 부담을 경감하는 보완재 기능을 할 것이란 주장도 내놨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민간보험은 공적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비급여 항목 등에 대해 보완적·보충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며 "보험사가 공공의료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의료 민영화를 위한 발판으로 보는 시각은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보험권은 자신들에게만 진입 장벽을 높인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처사라고 말한다. '공공데이터법'에 따르면 영리 목적을 위한 공공데이터 제공에 대해 합리적 이유 없는 제한을 금지하고 있는데 건보공단은 현재 제약사와 의료기기 업체에 동일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난임 치료 등 혁심 상품 개발 가능
보험권은 공공의료데이터 개방 시 새로운 위험과 신의료기술을 보장하는 혁신 상품들이 출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관련 업계는 해당 상품·서비스 예시로 먼저 소비자 니즈가 높은 난임 검사‧치료, 체내수정비용 보장 등 여성 전용 신상품 개발 등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사춘기 장애, 동맥경화, 지질단백질 대사 장애 등 '소아비만 동반질환' 보상 상품 개발도 염두에 두고 있다. 국내 소아비만 급증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현재 해외 자료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신항암치료수술비를 보장하는 상품 개발도 가능하다. 신항암치료수술비는 수술 부작용이 작고 효과가 높아 많은 환자들이 선호하지만 3000만원에서 5000만원에 이르는 높은 치료 비용으로 인해 대부분 포기하는 수술로 꼽힌다.
아울러 유병자‧고령자 등 취약계층을 위한 상품 개발로 보험 사각지대 역시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유병자 상품은 데이터를 통해 고혈압 환자의 심뇌혈관 질환 발생 위험도를 분석해 기존에 보험 가입이 어려웠던 고혈압 환자 전용 상품 개발이 이뤄질 수 있다. 또한 갑상선 기능 항진(저하)증 환자의 꾸준한 복약 관리와 건강한 삶 유지 간 상관관계를 분석해 갑상선 환자 전용 상품 개발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고령자 상품은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제 연령이 아닌 건강나이를 기초로 보험료를 산출하고 할인 등이 적용되는 보험상품도 판매할 수 있다. 예컨대 실제 나이가 65세지만 건강나이가 50세로 측정되면 50세 기준 보험료가 산출되는 방식이다.
헬스케어를 접목한 ‘건강증진형 보험상품’이 활성화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일례로 골다공증 환자의 골절 발생률 등 데이터를 분석해 골다공증 관리 서비스 제공이나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이 가능해진다. 여기에 '간수치 증가→간경화→ 간암' 등 질병 발병 순차패턴을 분석해 보험 가입자를 위한 맞춤형 관리 서비스와 사전 질병 예방이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선 공공의료데이터를 활용해 이미 다양한 상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실제 남아프리카공화국 민간 보험사인 올라이프(AllLife)는 데이터를 활용해 에이즈·당뇨환자가 가입할 수 있는 사망·장해보장 상품을 판매 중이다. 미국 민간 보험사인 카이저퍼머넌트(Kaiser Permanante)도 의료데이터 분석을 통해 치료 시기가 지연된 환자들을 자동 감지해 고위험 환자에 대한 사전 예측 서비스를 상용화했다.
일본은 자국 내 의료데이터센터(JMDC·Japan Medical Data Center)가 보험사에 건강정보를 제공해 건강나이에 기반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핀란드 역시 국민의 모든 의료정보를 전산화해 한곳에 모아 관리하는 '칸타 시스템'을 개발해 익명 처리한 정보를 민간기업 등 누구나 활용 가능토록 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해외는 이미 의료데이터 활용 보장을 강화해 헬스케어 산업 성장 등 긍정적 효과가 확산되고 있다"며 "건보공단은 조속히 공공의료데이터를 개방하고, 보험사가 사회·경제적으로 유의미하게 공공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공보험·사보험이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데이터 컨트롤타워와 이익 배분 방안 논의 필요"
전문가들은 업권 간 건전한 데이터 개방·활용 논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 학회, 시민단체, 건보공단, 보험업계 등이 참여하는 '공보험·사보험 데이터 협의체(데이터 컨트롤타워)' 등을 구성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성희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무총리 산하에 '(가칭)데이터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관계 부처가 모두 참석함으로써 데이터산업 활성화를 위한 개방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며 "위원회를 통해 현행 데이터 개방 제도를 점검하고 체계적인 데이터 활용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중요 사항을 심의 조정하도록 하는 등 법과 원칙에 따른 데이터 이용 문화를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관련 논의가 진행되면 의료데이터 활용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정보 주체에 대한 이익 배분 방안'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희우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민간기업이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이익 중 일부를 전 국민에게 배분한다면 관련 논란이 보다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직관적인 방안 중 하나는 공공의료데이터 활용에 따른 수익 일부를 국민건강보험기금에 귀속시키는 방안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사 이익 중 공공의료데이터로 인한 부분을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겠지만 향후 지속적인 논의를 거쳐 구체적인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보험권이 시민단체·의료계 등 의견을 일부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달 열린 '건강보험자료 제공 가이드라인 토론회'에서 김종민 대한의사협회 보험이사는 "공공의료데이터 가명 정보 역시 다른 정보들과 조합하면 개인이 특정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개인정보 유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가명 정보보다는 익명 정보를 활용하거나 가명 정보와 익명 정보를 구분해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보험사가 특정 환자군에 대한 보험 가입 거절이나 보험료 인상으로 연계하는 등 사익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했을 때 그리고 개인 데이터 식별을 통해 개인정보를 유출했을 때 등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정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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