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4년 안에 주요 경영진을 바우허우(八五後·1985년대 출생자)와 주링허우(九零後·1990년대 출생자)로 구성할 것”
우융밍(吳泳銘·48) 알리바바 신임 최고경영자(CEO)의 취임 일성이다. 앞서 알리바바는 회사를 6개 사업부로 나누는 조직개편안을 공개하며 ‘스타트업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이에 발맞춰 젊은 인재를 중심으로 그룹을 꾸리고, 과거 방식에서 탈피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과거 성공했던 방식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며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마윈의 지난 5월 발언과도 맥을 같이한다.
10일 알리바바에 따르면 장융(張勇·51) 알리바바 전 회장 겸 CEO가 그룹 수장직에서 물러났다. 차이충신(蔡崇信·59) 알리바바 부회장이 회장으로, 우융밍 전자상거래 부문 책임자가 CEO로 교체되는 수뇌부 교체가 완료된 것. 당초 장융이 맡을 것으로 예정됐던 클라우드 인텔리전스 그룹 회장 역시 우융밍에게 넘어갔다.
변호사 출신 차이충신, 소프트뱅크 투자 유치·뉴욕증시 상장 주도
마윈, 장융에 이어 세 번째로 알리바바를 이끌게 된 차이충신은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동아시아학과를 전공한 뒤 동대학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뉴욕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1990년부터 약 3년간 미국 대형 로펌 설리번 앤드 크롬웰의 뉴욕 본사에서 세무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 뒤 스웨덴 발린베리그룹의 투자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로 자리를 옮겼다.차이충신이 마윈을 알게 된 건 1999년 인베스터AB 홍콩지사에서 근무할 때였다. 20명의 직원과 함께 45평 남짓한 아파트를 사무실 삼아 일하던 마윈의 열정과 이상주의에 매료된 그는 연봉 70만달러를 포기하고 마윈과의 창업을 결심한다.
마윈은 차이충신의 이 같은 용기에 대해 기업가 정신의 표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타고난 기업가 기질 덕분에 무모한 도전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지만, ‘든든한 백그라운드’도 한몫했다. 차이충신은 3대에 걸친 법조계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차이중쩡(蔡中曾)은 1953년 대만인 최초로 예일대 법학학사를 취득했고, 대만 최초의 로펌을 설립하기도 했다. 차이충신의 남다른 투자 안목 역시 굵직한 재무·투자 케이스를 주로 맡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차이충신은 월급 500위안을 받으며 알리바바그룹의 초대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맡게 된다. 합류 직후부터 국내가 아닌 해외 투자사를 물색했던 그는 때마침 골드만삭스가 중국 인터넷 기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됐고, 알리바바 합류 두 달 만에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게 된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면서 알리바바는 중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트업으로 세간의 주목도 받게 된다.
2000년 인터넷 기업 버블 논란의 직격탄을 맞았을 때 소프트뱅크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며 알리바바를 구해낸 것도 차이충신이다. 특히 당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3000만달러를 투자하는 조건으로 알리바바 지분 40%를 요구했는데, 차이충신이 지분을 20%로 낮추고 2000만달러만 받는 조건을 밀어붙였다. 그의 판단과 능력이 없었다면 알리바바는 진작 마윈의 손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셈이다. 2007년 홍콩 증시, 2014년 뉴욕 증시 상장 역시 그의 작품이다.
차이충신은 2019년 마윈 은퇴 때부터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됐지만 당시 마윈과 함께 알리바바 경영에서 잠시 물러났었다. 다만 알리바바를 떠나있던 지난 4년 동안에도 변함없는 투자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자타공인 농구광이었던 그는 같은 해 브루클린 네츠 지분 100%를 확보하며 중국인 최초 NBA(미 프로농구) 구단주가 됐고, 이후 브루클린 네츠의 시가총액은 두 배 이상 뛰었다.
기술·경영 능력 모두 갖춘 마윈 '비밀병기' 우융밍
차이충신과 함께 알리바바를 이끌게 된 우융밍은 '십팔나한(十八羅漢)'으로 불리는 18명의 창업자 중 유일한 개발자였다.우융밍은 저장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일자리를 찾던 그는 1995년 마윈이 알리바바 창업에 앞서 세운 '중궈황예(中國黃葉·Chinapage.com)' 기술직에 지원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마윈과 인연을 맺게 된다. 면접 당시 플로피 디스크에 직접 만든 프로그램을 넣어가는 등 '능력' 어필을 했지만 정작 마윈의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았던 것은 그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다는 후문.
우융밍은 창업 초기 타오바오의 기술 토대를 구축하고, 알리페이 출시를 주도하며 알리바바의 초석을 다졌다. 그룹의 모든 시스템이 우융밍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알리페이 최고기술책임자(CTO)와 사장을 역임했다. 우융밍이 외부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마윈의 특별 보좌관으로 재직하면서다. 이때부터 우융밍은 마윈의 ‘비밀병기’로 통했다.
우융밍은 개발자 출신이지만 어깨 너머로 비즈니스 기술을 배우면서 기업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하게 된다. 그는 PC가 주를 이루던 2000년대 후반, 인터넷 접속 형태가 모바일 단말기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측하며 사업 모델 전환을 추진했다. 그의 주도로 2008년부터 자체 테스트를 시작해 3년 만에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의 모바일 버전을 공개했고,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모바일 시대가 열렸다. 기업가로서의 자신의 진가 역시 증명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기술력·젊은 피 앞세워 ‘제2의 개국’ 이룬다
앞서 알리바바는 지난 3월 회사를 6개 사업부로 나누는 조직개편안을 공개했다. 이른바 ‘1+6+N’ 체제로, 1개의 지주회사 알리바바 그룹과 6개의 독립 사업 그룹(클라우드인텔리전스그룹·타오바오 등), 향후 등장할 수 있는 개별 사업 회사를 의미한다. ‘스타트업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셈이다. 개국공신인 차이충신과 우융밍의 활약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우융밍은 벌써 그룹 경영 새 판짜기에 나섰다. 우융밍은 취임 사흘째인 지난 12일 그룹 경영 새 비전으로 ‘인공지능(AI) 중심(AI-driven)’과 ‘사용자 우선(user first)’을 제시했다.
우융밍은 “미래 10년의 가장 중요한 변화 요인은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AI에 의한 변혁일 것”이라며 “AI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으면 우리는 대체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AI를 우선으로 하면서도 우리를 중국에서 가장 큰 기업으로 만들어 낸 수백만명의 사용자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융밍은 알리바바가 AI 중심의 사업 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력으로는 ‘인재 육성’을 꼽았다. 그는 “이러한 젊은 인재 육성을 통해 스타트업식 경영 마인드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과거 방식에 머무르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은 이에 대해 “장융은 소비와 클라우드 컴퓨팅, 세계화 등 3대 전략을 내세웠던 데 비해 우융밍은 기술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며 “날로 평균화하고 있는 인터넷 사업모델 속에서 기술력으로 차별점을 찾겠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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