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법언이 있다. 판결문은 법관의 생각이 담긴 공적 결과물로, 실체적 진실의 요체다. 판결문은 국민이 사법권의 올바른 행사 여부를 파악하고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판결문을 바탕으로 법조 기사를 작성할 때 사건을 심리한 재판장 이름을 넣는 것도 같은 이치다.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법원은 사건 당사자나 이해관계자가 아니면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 법원은 형사사건에 대해 2013년 1월 1일 이후 확정된 판결서만 공개하고 있다. 민사·행정·특허 사건은 2015년 1월 1일 이후 확정된 사건에 한해 판결문 검색·열람이 가능했다. 하지만 민사소송법 개정으로 올해 1월부터는 확정되지 않았더라도 민사·행정·특허 사건 판결문도 인터넷 등을 통해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그러나 여전히 판결문 공개는 반쪽짜리에 그치고 있다. 우선 민사와 달리 미확정된 형사사건의 1심과 2심 판결문 정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특정 사건이 대법원 판단을 받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소요된다. 새로운 수법의 형사범죄 처벌 경과를 국민이 제대로 알려면 3~5년 지난 이후에나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특히 영업 비밀 보호를 이유로 열람 제한을 신청한 사건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영업 비밀 보호 등을 이유로 대기업 총수의 비위 행위나 기업의 위법 행위가 드러나는 사건의 판결문에 대해 열람 제한을 신청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지난 5월 미인증 배출가스 관련 부품이 탑재된 차량을 불법 수입한 혐의로 기소된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법인은 1심에서 벌금 20억원을 선고받고 법원에 판결문 열람 제한 신청을 했다. 영업 비밀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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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대기업은 배임·횡령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총수가 실형을 선고받자 판결문 열람 제한을 신청하기도 했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대기업 총수가 관련된 사건이었지만 법원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판결문 열람 제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위법을 저지른 기업들이 영업 비밀을 핑계 삼아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사전에 차단된다면 준법 경영에 대한 경각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판결문은 실시간으로 사회적 비평에 놓여야 한다.
미국 연방법원은 확정 여부에 상관없이 선고 후 24시간 이내에 판결문을 공개하고 있다. 독일도 선고 후 1~3개월 이내에 판결문을 선별 공개한다. 재판 보도와 관련한 국민의 알 권리가 사생활 자유와 비밀 침해보다 더 크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까닭이다. 정보 공개에 소극적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중국 또한 판결문을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판결문 열람 서비스에 대한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하는 것도 사법부의 과제다. 판결서 열람 서비스에 접속해 사건번호나 키워드를 통해 판결문을 검색할 때 한번에 검색할 수 있는 기간은 2년으로 제한된다. 판결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미리보기 글자 수도 800~900자(공백 포함)로 제한된다.
검색 기능 제한으로 인해 판결문에 대한 정확한 연도나 사건번호를 모르면 여러 차례 검색을 반복해야 한다. 판결문을 이미지 형태의 PDF 파일로 제공하는 점도 문제다. PDF 파일은 텍스트 변환과 기계 판독이 불가능하다. 기계 판독이 어려워지면 데이터 베이스화도 불가능하다. 리걸테크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판결문을 비롯한 모든 법정 기록을 통상적으로 공개하는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법률 데이터의 연구 목적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사법부는 국가의 3권 가운데 유일하게 선출직이 아니지만 권한과 임기를 보장받는 곳이다. 국민 참여를 통한 비평이 차단된다면 사법부는 소수의 법조 엘리트들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판결문은 법원이 국민과 관계를 맺는 가장 기본적 매개체다. 국민이 판결문을 쉽게 보지 못하고, 판결문에 담긴 법관의 논리를 평가하고 견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적 사법감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 사법개혁의 핵심은 투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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