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CS의 서울 중앙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상담원 A씨(32)는 인공지능(AI)과 함께 일하는 게 일상이다. 상담 전화가 오면 고객이 인간 상담원과 대화에 앞서 AI 상담원과 나눈 대화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모니터 화면에 뜬다. 고객이 어떤 곤란함을 겪고 있는지 즉시 파악하고 해결법을 찾을 수 있다. 고객이 무엇을 곤란해하는지 따로 묻지 않아도 된다.
고객이 잘 모르는 문제를 물어봐도 걱정은 없다. 수십년간 쌓인 상담 데이터를 AI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상담지식 시스템에 관련 키워드를 넣으면 해법을 즉시 찾을 수 있다. 고객은 어려움과 궁금증을 빠르게 해소하고, A씨는 화난 고객을 진정시킬 일이 크게 줄어드니 서로 '윈-윈'이다.
과거에는 상담이 끝나면 20초가량을 투자해 상담 내용을 정리해서 전산에 입력해야 했다. 향후 고객 상담 품질을 올리기 위해서다. A씨는 이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지만,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AI와 함께 일하고 나서는 달라졌다. AI가 고객이 무엇을 물어보고 어떻게 처리했는지 정리해서 화면에 보여준다. 5초 정도만 투자해 이상이 없는지 보고 승인만 눌러주면 된다.
KT 관계자는 "콜센터 업무에 AI를 적용한 뒤 상담원들의 대고객 상담 효율이 크게 향상됐다"며 "8시간만 일해도 과거 9시간 일하는 것과 동일한 업무 효율을 거두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3월부터는 KT가 자체 개발한 거대언어모델(LLM)을 업무에 적용, 상담원뿐 아니라 관리자인 팀장급 직원 업무 효율도 크게 향상됐다. 과거에는 팀장이 상담원과 고객 대화 내용을 모두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아 심화 상담에 나섰지만, 지금은 사람보다 요약·정리를 훨씬 잘하는 초거대 AI가 문제점을 즉시 찾아준다. 상담원에게 고객 민원 해결 방법도 더 빠르게 제안할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도 AI 상담원 도입으로 문제 해결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어 편리하다. 간단한 질문은 AI 상담원에게 물어봐도 척척 답변한다. 최근에는 음성 인식과 데이터 분석 기술 발전으로 어려운 질문을 해도 원하는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커졌다. 인간 상담원은 근무 시간에 한계가 있어 통화하기 위해 짧게는 1~2분에서 길면 1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AI 상담원은 365일 24시간 언제든지 즉시 연결된다.
이처럼 콜센터를 포함한 대고객 서비스는 AI 등장으로 가장 큰 변화에 직면한 업종이다. 사람과 AI가 함께 일하는 모습은 일상이 됐다. 간단한 일은 AI가, 어려운 일은 사람이 나눠서 한다. 과거 사이언스픽션(SF)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 이제는 현실인 곳이다.
지식 검색·요약에 특화한 생성 AI 등장은 사람과 AI가 함께 일하는 모습이 기업 업무에 보편화될 신호탄이다. 경영계에선 워드·엑셀·파워포인트 등을 이용했던 직장인이 앞으로 AI를 도구로 써서 일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워드·엑셀·파워포인트 등이 하던 역할을 AI가 대신할 것"이라며 "오피스 프로그램 활용 능력이 직장인 역량이던 것처럼 앞으로는 AI를 잘 사용하는 게 핵심 역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하면 한 시간 넘게 걸릴 일을 생성 AI는 1분 내로 할 수 있고, 특히 단순 반복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데 강점이 있다"며 "학계에서도 AI가 논문을 읽고 요약하는 모습이 보편화되면서, 논문도 단순히 많이 쓰는 대신 핵심 결과만 정리하는 형태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AI의 등장으로 수백년간 이어져 온 업계 전통과 모습이 순식간에 달라진 곳도 있다. 바로 지난 2016년 '알파고'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바둑계다. 알파고 이후 이를 뛰어넘는 바둑 AI가 속속 등장함에 따라 인간이 AI를 이기는 것은 이세돌 9단 이후 더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신의 한 수'가 오랜 기간 바둑을 둔 국수가 고심 끝에 꺼내든 묘수 대신, AI가 두는 바둑을 인간이 얼마나 잘 따라 하는지에 있다고 인식이 바뀔 정도다. 프로 기사와 해설가 모두 AI로 경기를 분석·복기하고, 조금이라도 더 AI를 닮고자 했다. 그만큼 바둑 경기는 더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알파고 쇼크 이후 7년, 인간은 AI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인간과 AI가 함께하면 AI를 넘어설 수 있음이 확인됐다. 지난 2월 미국 아마추어 바둑 랭킹 2위인 케린 펄린은 알파고를 넘어서는 기력을 가진 바둑 AI '카타고'와 대전에서 15전 14승을 거뒀다. 비결은 돌을 크고 천천히 놓아서 AI를 산만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쉽게 파악할 함정을 바둑 AI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런 바둑 AI 약점은 미국 AI 스타트업이 만든 분석 AI가 알려줬다. 사람과 AI가 왜 협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웹소설 일러스트를 부업으로 하는 일러스트레이터 B씨(37)는 얼마 전 본지 통화에서 "수백만원을 들여 최신 그래픽카드(GPU)를 사고 스테이블 디퓨전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AI에 내 그림체를 학습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만든 후 재가공하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세상이 변하는데 나만 우직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토로했다.
집단 대응에 나선 사례도 있다. 지난 5월 1만1500여 명의 작가들이 속한 미국작가조합은 AI로 미국 작가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다며 집단 파업에 돌입했다. 이번 파업은 영화·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제작하는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작가 대신 생성 AI에 대본을 만들라고 맡기면서 시작됐다. 많은 작가가 일자리를 잃었고, 일부 작가는 생성 AI가 만든 대본 초안을 수정하는 업무를 맡았다. 작가들이 기존의 쓴 대본을 생성 AI 학습에 활용한 탓에 기업들이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기업과 AI를 대상으로 한 인간의 첫 파업은 148일 만에 끝났다. 양측은 앞으로 3년 동안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AI가 편집할 수 없게 했고, 작가가 AI 대본을 고치더라도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합의했다. AI가 주가 되고 인간이 이를 보조함으로써 인간이 받는 노동의 대가가 줄어드는 일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AI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지는 않았다. 비용 효율적인 AI가 인간을 대체할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