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괴물은 누구인가.” 국내에서도 개봉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는 이 질문이 반복해서 나온다. 일본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는 동일한 상황이 3인의 시선에서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를 보여준다. 싱글맘 사오리의 눈에는 아들 미나토에게 “네 뇌는 돼지 뇌와 뒤바뀌었다”는 언어 학대를 하고 폭력을 행사한 호리 선생, 교사가 폭력을 행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사과하기에 급급한 교장 선생이 괴물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바꿔 호리 선생 관점에서 같은 상황을 복기해 보니 그는 괴물이 아니라 성실하게 직분을 다하려던 선한 선생이었음을 알게 된다. 호리 선생이 미나토에게 ‘돼지의 뇌’를 말했고 폭행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심지어 그가 ‘걸스바’라는 유흥업소에 출입했다는 소문도 근거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호리 선생을 끌어들여 나쁜 사람으로 만든 거짓말을 한 미나토, 그가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좋아했던 요리가 괴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다시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의 시선으로 상황을 돌아보니 이들도 괴물은 아니었다. 두 아이는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호리 선생을 끌어들여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 거짓말들을 한 것이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엄마 사오리,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호리 선생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어른들도 모두 편견에 사로잡혀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영화에서 괴물은 없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선한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각자가 갖고 있는 오해와 편견에 따라 서로를 괴물로 여겼을 뿐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던진 질문에 따라 ‘괴물은 누구인가’를 찾는 데 매달렸던 관객들은 막상 괴물은 없었음을 알게 되면서 자괴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본 어느 교실에서 벌어진 학교 폭력 얘기를 넘어 오늘 한국 정치에 대입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동안 지켜본 우리 정치야말로 상대를 어떻게든 괴물로 만들려는 괴물 찾기, 괴물 만들기 정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여와 야, 진보와 보수 간에는 이념과 철학과 정책을 둘러싼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 구성원들 간에 생각의 차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이는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며 그런 생각의 차이를 조정하며 합의를 모색하라고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에서는 그 같은 차이가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와 다른 것은 절대악이고, 우리 주장만이 절대선이라는 도그마에 갇혀 있다. 언제나 우리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독선이 판을 친다. 그러니 정치는 공존과 타협이 아니라 상대를 악마로 만들고 악마와 성전(聖戰)을 치르는 사생결단의 장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는 100% 악마도, 100% 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고 깨면 나쁜 짓만 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려는 생각만 하는 정치인도 없고, 자나 깨나 나라 걱정만 하고 사심이라고는 없는 착한 정치인도 없다. 대개는 어느 정도의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존재가 정치인들, 아니 우리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도 정당과 정파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악마와 괴물로만 몰아가는 정치가 횡행하는 것은 정략이 우리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기득권을 잃지 않고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그런 행태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극단적이고 큰 목소리를 외치는 정치인일수록 그 바탕에 사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세상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는 극단주의 정치의 중심에는 여야 혹은 보수·진보의 강경파 세력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들은 천사고 상대는 악마라고 착각하는 강경파 극단주의자들이 팬덤정치를 등에 업고 우리 정치를 괴물들의 정치로 몰아왔다. 그들이 우리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현실에서는 정치가 본연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정치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철학자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이런 잠언이 나온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영화 <괴물>이 관객들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얘기다. 괴물을 찾아 괴물과 싸우겠다던 사람들이 타인의 허물을 침소봉대하여 괴물로 만들며 상처를 준다. 자신들이 입는 상처에는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입히는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용감한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검객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누구를 겨냥해서 칼을 휘둘러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치에서 상대의 잘못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나 괴물로 만드는 일은 그와는 의미가 다르다. 타인을 괴물로 만들려다 자신이 진짜 괴물이 된 사람들 얘기는 영화가 아니라 2023년 한국 정치에서 펼쳐졌던 광경이다. 2023년이 가면서 그런 정치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총선도 있는데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여야 정당들은 공천에서, 유권자들은 투표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우리 정치가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전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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