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스러워~ 후회스러워~ 정말 너를 사랑했는데~"
4일 밤,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 이곳에선 가수 혜은이의 ‘후회’, 나미의 ‘보이네’ 등 추억의 히트곡들이 디제잉을 통해 흘러 나왔다.
MZ세대부터 중장년층까지 갤러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거나,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형형색색 함경아의 작품에 흠뻑 취했다.
이날, 아트페어 ‘키아프-프리즈 서울’ 개막을 기념해 열린 ‘삼청나잇’이 삼청로 일대를 환하게 밝혔다. 갤러리와 미술관이 밀집한 한남동과 삼청동, 청담동에서는 각각 하루씩 한남나잇, 삼청나잇, 청담나잇이 진행됐다. 키아프-프리즈 서울 개최 기간에 맞춰, 갤러리들이 문턱을 낮추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미술 축제를 마련한 것이다.
프리즈 서울 기간 서울 곳곳에선 그야말로 '예술의 밤'이 펼쳐졌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는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작품이 DDP 외벽을 화려하게 비췄고, 마포새빛문화숲에서는 달빛 소나타가 울려퍼졌다.
보고, 듣고, 먹고…모두가 만끽한 삼청로의 밤
삼청나잇 밤,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해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학고재갤러리 등 삼청로를 따라 이어진 갤러리들은 문을 활짝 열고 관람객들을 맞았다. 사람들은 각 갤러리가 제공한 샴페인 혹은 음료를 마시거나 과자 등을 즐기며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서울의 밤을 만끽했다.
특히 국제갤러리는 일반인에 공간, 음식, 전시 관람 모두를 무료로 제공했다. 갤러리에 삼삼오오 모인 젊은이들은 분식 트럭에 마련된 튀김, 떡볶이, 핫도그에 맥주를 곁들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등 밤이 주는 낭만에 흠뻑 빠졌다. ‘전시장 내 모든 음료 반입금지’란 안내문도 이날만큼은 예외였다. 갤러리현대에서는 사람들이 샴페인을 마시며 조각가 존배의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삼청나잇을 찾았다는 유지혜씨(20대)는 “회사가 근처라 퇴근하고 바로 왔다. 음식도 맛있고, 그림도 보고, 노래까지 신난다”고 말했다.
미술관도 파티에 동참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늦은 저녁까지 불을 밝혔다. 전시는 저녁 9시까지 이어졌고, 미술관 앞에 마련된 ‘아트북존’에서는 그림책, 아티스트북, 색색의 북커버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씽씽카를 타고 나온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어놀았고, 아티스트 듀오 김치앤칩스의 야외 설치 작업인 ‘또 다른 달’은 미술관 마당을 환하게 비췄다. ‘또 다른 달’이 30여 개가 넘는 파란 레이저를 뿜어내자, “달 떴다!”고 외치는 한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거장의 그림…수천줄기 빛, 어디까지 갔을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도 서울의 밤을 수놓았다. 8일까지 열린 ‘서울 라이트 DDP 2024 가을’에서는 추상 미술 거장인 고(故) 김환기 작가의 원작 9점을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시(時)의 시(詩)'가 매일 밤 DDP 회색 외벽에서 춤췄다. 국내 유명 대중음악 프로듀서 윤상과 미디어 아티스트 박제성이 각각 음악과 영상 연출을 맡았다.
사람들은 DDP 광장 바닥이나 계단, 잔디밭 등에 앉거나 누워 빛의 향연에 몰입했다. ‘시의 시’는 거장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듯한 경이로운 느낌을 줬다. 고요하면서도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에 압도됐다가, 끝없는 우주의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8분 분량의 영상은 40년이 넘게 작가로 보낸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역순으로 구성해, 한 거장의 삶과 작품을 보여줬다. 김 작가가 뉴욕에서 사망하기 전 그린 단색의 전면점화 대표 시리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을 시작으로, 점화 이전의 여러 시도와 실험을 보여준다. 마지막은 1950년대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별세한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거친 붓칠로 표현한 ‘성심’으로 마무리된다.
박제성 연출가는 “물감과 빛의 색은 다르다”며 “물감의 색은 변하지만, 빛의 색은 영원한 색을 만들 수 있다. (실제) 점을 찍었을 때 그 색이 무엇이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적인 동양철학과 태도를 지킨 김환기 선생님을 미디어 아트로 미래적 비전을 담아서 표현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작품을)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DDP 잔디 언덕의 ‘아워 비팅 하트’는 1만1000개의 미러 타일로 이뤄진 하트모양의 미러볼이 빛을 뿜어내며, 서울밤의 파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웅장함은 크기가 아니라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데서 나온다”는 톰 존스 스튜디오 버티고 수석 디자이너의 말처럼, 밝을 때는 작아 보였던 미러볼이 어둑어둑해지자 강한 빛을 발산하며 웅장함을 자랑했다.
톰 존스는 “빛의 번짐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을 보여준다”며 “빛이 미러볼에 부딪혀서 다양한 방향으로 분사되는 것은 환경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빛은 축제의 분위기를 준다"며 “이 빛은 수천 줄기로 뻗어 나가면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도심 속 달빛 아래서 펼쳐진 클래식 공연
달빛이 내려앉은 도심 속 공원에서는 클래식 공연이 펼쳐졌다. 6일 마포새빛문화숲 야외 특설무대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이 선사하는 달빛 클래식 ‘문소나타’가 열렸다. 피아니스트 송재근과 합을 맞춰 차이콥스키 그리운 곳의 추억, 드보르자크 4개의 낭만적 소품 등을 연주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공원 내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금세 조용해졌고, 일부 관람객들은 챙겨온 돗자리를 깔고, 과일 등을 먹으며 여유롭게 공연을 즐겼다.
마포구 주민인 한 50대 여성은 “마포에 이런 공간이 있는지도 몰랐다"며 "시원한 야외무대에서 클래식을 들을 수 있으니 참 좋다”고 말했다.
가을밤 음악회는 계속된다. 세종문화회관은 오는 20일과 22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예술단 가을음악회’를 첫 개최한다. 20일 저녁에는 서울시합창단이 ‘사운드 오브 뮤직’, ‘여름 동요 메들리’, ‘넬라 판타지아’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사한다. 22일 저녁에는 서울시뮤지컬단이 ‘여신님이 보고 계셔’, ‘서편제’ 등 현대 창작 뮤지컬부터, ‘오페라의 유령’, ‘시카고’, ‘맘마미아’ 등의 명곡을 노래한다. 전석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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