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용어에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큰 말은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단은 여러 위기에서도 끝내 살아남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대마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은 크게 여당인 국민의힘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있다. 두 정당은 분당과 합당, 당명 변경 등을 거치며 존재감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최근 국민의힘 상황이 위태롭다. 4·10 총선 참패에 이어 '구원투수'로 주목받은 한동훈 대표 리더십도 흔들리며 대마불사 공식이 무색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尹과 틀어진 韓…원내 장악도 실패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스타 정치인'이다. 여권 지지층에게는 아이돌(idol) 취급을 받는다. '조선제일검'으로 불리던 실력파 검사가 문재인 정부라는 거악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나, 이를 이겨내고 법무부 장관과 현 여당 대표 자리를 거머쥐었다는 '권선징악' 서사가 있다.
그러나 지금 당면한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우선 의형제와도 같았던 윤석열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지며 당정이 엇박자를 내기 시작했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고 여권 내부의 전체적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독대 요구 무시'와 '행사 패싱 논란' 등 파열음만 커지고 있다.
원내 장악력이 미흡한 점도 한 대표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 지난 7·23 전당대회 기간 공약했던 '제3자 추천 채상병 특검법' 발의는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고, 검건희 여사 관련 리스크 해소 역시 당내 이견 때문에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의료대란' 해결을 위해 야심 차게 꺼냈던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도 감감무소식이다.
결국 이런 악재는 당정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달 30일부터 지난 4일(공휴일인 1일과 3일 제외)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5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27.9%였다. 2주 연속 20%대를 기록했다.
지난 2일과 4일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4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정당 지지도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p)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32.7%로 나타났다. 당정 모두 이른바 '콘크리트'로 대변되는 핵심 지지층만 간신히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다.
이재명, 총선 승리로 당대표 연임까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지난 대선에서 윤 대통령과 초접전을 벌인 끝에 낙마했으나, 재보궐 선거로 국회 진입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또 윤석열 정부와 대립각도 날카롭게 세우면서 '윤석열 대항마'로 입지를 강하게 다지는 데 성공했다.
지난 4·10 총선도 민주당이 175석(지역구 161석+비례대표 14석)을 가져가면서 전체 의석의 58.3%를 확보하며 크게 승리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108석(지역구 90석+비례대표 18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총선 승리 효과는 민주당 8·18 전당대회에 이어지며 이 대표는 85%가 넘는 득표율로 당대표 연임에 성공했다. 이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다만 이 대표에게도 '사법리스크'라는 난관이 남아 있다. 오는 11월 15일과 25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와 위증교사 혐의 1심 선고가 잡혀 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100만원 이상, 위증교사 혐의는 금고형 이상을 확정 받을 경우 의원직 상실은 물론이고, 차기 대선 출마도 불가능하게 된다.
이 대표 재판의 관전 포인트는 결국 '형량'과 '속도'다. 검찰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2년의 실형을 구형했고, 위증교사 혐의는 징역 3년을 구형했다. 보통 1심 결과가 대법원 판결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1심에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이나 실형이 선고될 경우 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2027년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는지도 중요하다. 공직선거법 270조는 피고인이 기소된 날로부터 1심은 6개월, 2심과 3심은 전심 선고로부터 각각 3개월 안에 반드시 끝마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의무가 아니라 훈시 규정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1심 선고만으로 이 대표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선거 승리'
최근 국민의힘 선거 성적표는 초라한 수준이다. 4·10 총선은 물론이고, 지난해 10·11 서울 강서구청장 재보궐 선거에서도 17.15%포인트로 참패했다.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는 0.73% 차로 신승을 거뒀다. 이 승리마저 국민의힘이나 윤 대통령이 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보다는 전임 정권의 부동산 정책 등 실패로 인한 승리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였다.
여의도 정가에는 '정당의 존재 이유는 선거 승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확실한 대선주자군이 있는 정당이 선거에 연거푸 승리하면 탄력을 받고 지지층이 결집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면 선거 패배가 거듭되면 핵심 정치인들의 위상은 추락하고 지지자들의 마음이 떠나게 된다.
국민의힘은 당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 아닌 외부 영입 인사(윤 대통령)를 향한 국민적 기대감과 전임 정부 정책에 대한 반감에 힘입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후 총선 등에서 대패하며 '영남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대마는 죽지 않는다지만, 악재가 거듭되면 불사 공식도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른바 '중수청(중도층, 수도권, 청년세대)'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당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편 기사에 나온 여론조사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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