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데일리] 한국 게임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는 필수 요건이 있다면 '스팀'에서 얼마나 많은 이용자를 확보했는지다. 스팀은 미국 비디오 게임사 밸브 코퍼레이션이 운영하는 게임 유통 플랫폼으로 국내 게임사의 글로벌 진출 관문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스팀에 집계된 일간 접속자 수가 곧 흥행 지표로 통하게 되면서 스팀 입점으로 인한 명암도 뚜렷해지고 있다.
16일 게임 업계에 따르면 최근 넥슨과 엔씨소프트, 넷마블 등 주요 게임사들은 다수 기대작을 스팀에 선보이거나 출시를 준비 중이다. 신작 중에는 넥슨이 지난달 테스트를 시작한 '슈퍼바이브'와 엔씨소프트가 같은 달 글로벌판을 출시한 '쓰론 앤 리버티'가 있다. 넷마블도 지난 5월 내놓은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를 내년 중 스팀에서 서비스할 계획이다.
◆'배그' 성공 계기로 '스팀' 진출 활발
스팀이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때는 2005년 무렵이다. 당시만 해도 PC 게임은 CD나 DVD를 구매해 컴퓨터에 설치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는데 스팀은 온라인에서 게임을 사서 내려받는 형태를 선보였다. 디지털을 통한 게임 소유와 플레이가 가능해진 것이다. 밸브 코퍼레이션이 자사 대표작 '하프라이프 2'를 스팀에 독점 배포하면서 세계 게이머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스팀이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가진 지위는 확고하다. 현재 계정 수는 10억개가 넘고 실제 접속하는 인원을 뜻하는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1억3000만명 이상이다. 최다 동시 접속자 수는 3787만명에 달한다. 스팀 운영사인 밸브 코퍼레이션의 연 매출은 60억~70억 달러(약 8조1500억~9조5100억원)로 추정된다.
국내 게임사들이 처음부터 스팀 입점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2000년대 중반 국내 게임 시장은 게임사 웹사이트에 접속해 게임을 무료로 내려받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다른 이용자들과 경쟁하거나 캐릭터를 육성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PC 게임 위주인 국내 시장에선 넥슨·넷마블과 같은 배급사가 자체 플랫폼(웹사이트)을 통해 게임을 유통해왔다. 독자가 출판사를 찾아가 책을 사서 보는 식이다.
스팀에서의 성공이 K-게임 흥행 지표가 된 시발점은 크래프톤의 '배틀그라운드(배그)'다. 배틀그라운드는 최대 100명에 달하는 캐릭터가 한정된 전장에서 전투를 벌여 살아남는 배틀로얄 장르로 2017년 3월 스팀을 통해 전 세계 출시됐다. 이후 10개월 만인 2018년 1월 스팀 최초로 동시 접속자 수 300만명을 돌파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배틀그라운드가 성공하며 크래프톤은 단숨에 게임 업계 유가증권시장 시총 1위(15조8300억원) 기업으로 도약했다.
배틀그라운드와 비슷한 시기에 글로벌 출시된 펄어비스의 대형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검은사막' 역시 스팀 진출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검은사막은 2017년 5월 출시 첫 주 만에 30만장이 팔렸다. 최근 들어 힘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펄어비스 연간 매출(지난해 기준 3335억원)의 75.7%(2525억원)를 차지한다.
이를 지켜본 게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스팀으로 뛰어들었다. 스마일게이트의 '로스트아크'를 비롯해 펄어비스 '블랙데저트', 넥슨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네오위즈 'DJ맥스 리스펙트 V' 등이 스팀에 공개됐다. 게임사들은 국내나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권에는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 자체 배급·유통망을 통해 서비스하고 북미와 유럽을 비롯한 시장에는 스팀을 활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스팀이 게임 유통망을 틀어쥐면서 스팀 데이터베이스(DB)에 동시 접속자 수가 얼마나 찍혔는지가 흥행을 가늠할 척도가 됐다. 스팀 DB는 스팀의 통계 서비스로 주간 인기 게임, 판매 수익 순위, 국가별 게임 다운로드 트래픽(데이터 양) 등을 제공한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PC방 점유율이 게임의 성패를 보여줬지만 배틀그라운드 성공 이후론 게임사들도 스팀에서 몇 명이 이용 중인지를 알리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스팀 대항마 노린 엔씨 '퍼플' 성공 가능성은?
스팀이 주최하는 신작 게임 공개 행사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게임사도 많아지고 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개막해 21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는 컴투스홀딩스와 카카오게임즈를 비롯한 대형 게임사뿐 아니라 앵커노드, 원더피플 등 중소 게임사까지 신작을 내놨다. 지난해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거머쥔 네오위즈의 'P의 거짓'도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 참여해 흥행에 성공했다.
게임사에게 스팀 입점은 글로벌 시장 개척의 교두보를 쌓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고민도 있다. 수익의 20~30%에 달하는 입점 수수료는 스팀 독과점의 폐해로 지목됐다. 밸브 코퍼레이션 측은 "스팀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생각하면 과하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게임사에게는 부담인 게 사실이다. 게임사가 스팀에 의존할수록 구글과 애플의 애플리케이션 상점 '갑질' 논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진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한국판 스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2019년 자사 모바일 게임을 PC에서 할 수 있게 해주는 플랫폼 '퍼플'을 내놨다. 지난달에는 스팀과 같은 유통 플랫폼으로 전환을 선언하고 자사 게임뿐 아니라 다른 개발·배급사의 게임도 들여와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현재로서는 퍼플의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미 스팀의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게임 유통 플랫폼에 도전장을 낸 마이크로소프트나 일렉트로닉 아츠 같은 글로벌 최상위권 회사들도 스팀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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