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강조하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현실화하면 한국 수출 실적이 크게 꺾이면서 저성장의 함정에 갇힐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 같은 불안감에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14일 4만원대까지 주저앉으면서 ‘사(死)만전자’라는 굴욕 타이틀을 얻었다. 뒤늦게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이라는 처방을 내놓았지만 이것이 본질적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주주들 사이에선 적금처럼 꾸준히 삼성전자 주식을 사 모으면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1등 기업에 대한 믿음마저 희석되는 모양새다. ‘그래도 삼성’이라던 말이 무색할 정도다.
명실상부 1위 기업이 속절없이 휘청이는 이 상황은 트럼프 포비아에 따른 여파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보면 삼성전자의 경쟁력 약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큰 문제다.
시발점은 매출 중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반도체 분야에서 뒤처지면서다. 고대역메모리반도체(HBM) 시장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 밀린 데다 잘나가던 D램과 낸드에만 안주하는 ‘역량의 덫’에 빠진 탓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낮은 수율이 발목을 잡고 있고, 세계 최대 파운드리 제조사인 대만 TSMC와 격차도 더 확대되고 있다.
또 시장 내 신뢰도 하락은 결국 회사에 대한 믿음 부족을 꼽을 수 있다. 믿음은 ‘결국엔 잘될 것’이라는 미래 비전인데, 삼성이 제시하는 뚜렷한 대안은 여전히 안갯속이어서다. 주주들이 회사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만 있을 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창구가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삼성전자의 미래 방향을 가늠할 잣대로 연말 인사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현호 사업지원 TF장 부회장의 ‘역할 힘빼기’가 얼마나 이뤄질지가 관전 포인트다. 재무통인 정 부회장 영향력이 커지면서 시장을 주도하기 위한 과감한 시도는 사라지고, 공학적 배경이 없는 경영진은 당장 매출 숫자와 안정에만 방점에 뒀다는 문제에서다.
기술경쟁력 복원이 시급한 시기에 CFO 출신 재무통인 최윤호 삼성SDI 대표, 박학규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사장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것도 삼성의 혁신에 도움이 될지 미지수다. 이 회장의 사법리스크 해소를 최우선에 둔 경영으로 인해 지금의 결과가 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근간인 반도체(DS) 부문에서 리더십을 채우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사업지원 TF와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이 혹독한 위기를 보내는 이 시기에 침묵은 혹독한 겨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지난 5월 이재용 회장은 유럽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며 만난 취재진을 향해 “봄이 왔네요”라고 짧은 인사를 건넸던 일이 떠오른다. 충분히 바닥을 다진 만큼 이제는 기업의 수장이 나서서 침묵을 깨고 봄을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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