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세 남성 곰치. 그의 핏줄엔 바다가 흐른다. 조부도, 아버지도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는 대대로 이어진 ‘뱃놈’이란 인생길에서, 묵묵히 닻을 내렸다. 그러나 바다는 늘 잔인했다. 바다는 위로 셋, 아래로 하나였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을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그는 ‘뱃놈’의 삶을 고수한다. 마치 살아남기 위해 주문을 걸듯 ‘만선’이란 단어를 되뇌며, 이렇게 외친다. “독(毒)으로 안 살먼 으찌께 살어?”
기를 쓰고 막아도 불행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온다. 이달 6일 막을 올린 국립극단 연극 <만선>(연출 심재찬)은 바로 그 순간을 기울어진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다가오는 비극을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불안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온다.
곰치의 아들 도삼이 최악의 결말로 치닫기도 전에 “이렇게 될 줄 뻔히 알었지라우!”라고 외치며 체념과 새로운 길을 말하지만, ‘가슴에 독을 찬’ 곰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는 독을 바짝 올리고, 다시 바다로 나아간다.
<만선>은 ‘내 문학의 본령은 핍박받는 빈자들’이라고 말했던 고(故) 천승세 작가가 1960년대에 쓴 작품이다. ‘빈자’ 곰치는 천민자본주의라는 폭풍 속에서 남의 배에 얹혀 먹고 사는 굴레에 갇힌 신세. 그런데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수십 년 만에 부서떼가 앞바다를 가득 메웠다. 드디어 만선의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벅차오른 순간, 선주 임제순이 빚을 갚으라며 배를 묶는다. 임제순은 곰치가 전 재산을 저당 잡는 문서에 지장을 찍고 나서야 배를 풀어준다.
그러나 바다와 세상은 이번에도 매몰차다. 거센 폭풍우로 곰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임제순은 돈만 말한다. “곰치가 죽든 살든 내가 알바 있어? 그 배가 내 배 중에서 기중 좋은 배란 말이여!”
<만선>은 근래 5년 동안 국립극단의 무대에 세 차례나 오를 정도로 많은 관객들의 선택을 받은 작품이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만선>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데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임제순과 곰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세월호 유족들은 돈을 노리고 시위를 한다는 비아냥을 견뎌야 했고, 아이들의 입에서는 ‘개근거지’와 ‘엘사’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서울 저소득층은 숨만 쉬고 88년 모아야 강남에서 집을 살 수 있다. 새벽 배송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수면 부족으로 생명이 위협받고 있지만, 이들 다수는 산재보험의 보호조차 못 받는다. 돈을 최고 상전으로 떠받드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불평등 심화, 생명경시 풍조는 곰치가 살던 1960년대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내 배를 살 수 있다는 곰치의 믿음을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뭍으로 가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바다로 나간 곰치의 고집을 탓하기보다는, 배를 묶은 세태를 탓하고 싶다. 불가항력 바다에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것은 그 바다뿐.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물고기처럼 인생의 굴레에 갇힌 곰치가 측은하다고. 더디더라도 언젠가는 그가 굴레를 걷어내리라 믿고 싶다.
명동예술극장에서 3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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