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의 함께꿈] '타오르는 대한민국' …4월 4일, 이 불길 끌 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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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25-04-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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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준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안상준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잔인한 3월이었다. 부주의가 빚은 산불의 참극은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순식간에 삭제해 버렸다. 날아다니는 불덩어리를 미처 피하지 못해 생명을 잃은 분도 적지 않았고, 몸을 보전하기도 다급했던 분들은 집과 전 재산을 잃고 막막한 상태로 내몰렸다. 그중에는 오랜 교직 생활을 마치고 시 외곽의 마을에 소박한 집을 짓고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려는 필자의 지인들도 있었다. 평생 연구에 힘쓰던 분의 소중한 서재가 잿더미로 변했고, 평생 작업에 몰두하던 조각가의 귀중한 작업실이 시커먼 재로 날아갔다.
‘마당이 있는 삶’을 애써 고집하며 조용한 마을에서 사는 필자의 집에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 마당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을 바라보며 앞날의 삶이 착잡하게 다가온다. 이 자리를 빌려 대피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찍 마을로 돌아와 주택의 소실을 막아준 이웃 주민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매캐한 연기 속에 며칠간 잔불을 경계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이 생사를 갈라놓는지, 누가 이 모든 참사의 원인인지, 이토록 참담한 재난 앞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건지···. 매스컴의 전문가들은 인재를 막지 못한 시스템을 탓하고, 사소한 부주의를 경계하지 않는 개인의 실수를 지적한다. 물론 이번 산불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람이었다. 문제의 3월 25일 오후 돌풍을 타고 산불은 하루 만에 80㎞를 날아 영덕의 바닷가 마을까지 덮쳤다. 만약 그날 필자의 집 마당을 태운 불꽃의 방향이 마을로 향했다면 우리 마을은 예외 없이 잿더미로 변했을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상상이고, 산쪽으로 방향을 바꾼 바람의 신에게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산불 재난은 필자에게 적잖은 물질적 손실과 함께 인간의 초라함을 일깨워준 비극이었다. 재난 앞에서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하기 어려웠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해마다 반복되지만 신입생은 3월의 캠퍼스에 희망을 실어 오고, 새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이 분주하듯 3월의 강의실은 필자에게도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날 오후 2시부터 5시 사이에 산불이 돌풍을 타고 그야말로 순식간에 의성을 넘어 안동 남부와 동부 지역으로 번져 필자의 마을까지 화마가 덮쳤을 때 필자는 교양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의 중에 긴급재난문자가 쉴 새 없이 울리긴 했지만 대학본부의 수업 중단 요청이 없었던 터라 예정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오후 5시에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자 하늘이 온통 주홍색을 띠었다. 다급히 확인해본 휴대전화에는 시 당국이 발송한 시민 대피를 명령하는 문자가 찍혀 있었다. 이웃분들께 전화를 드려보니 이미 대부분 마을을 떠나 긴급하게 대피 중이었고, 필자는 마을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밤 9시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돌아가보니 다행히 집은 건졌지만 마당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러고도 3일간 주변 산은 타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뒤덮은 마을에서 필자는 잔불을 경계하느라 때때로 양동이로 물을 퍼나르며 보냈다. 바로 옆마을의 뒷산 능선이 밤새도록 시뻘건 불꽃을 뿜어내며 타는 모습은 작렬히 뇌리에 새겨졌다. 섬칫한 광경의 목도는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을 동반했다. 생각하기도 싫고 아무 말도 하기 싫고 아무도 만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심각한 재난을 당한 분들의 심경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재난 앞에 인간은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힌 산불은 일주일 만에 잡혔다. 온갖 암울한 미래의 전망이 쏟아지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우리의 일상은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 윤석열이 지른 내란의 불이다.

헌법 재판소는 윤대통령 탄핵사건에 대한 선고 기일을 오는 4일로 정했다. 헌재가 탄핵소추를 인용하면 윤 대통령은 파면된다. 기각이나 각하할 경우 즉시 업무에 복귀한다. 탄핵심판 선고는 작년 12월 14일 윤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때로부터 111일  만이다. 
 
거의 4개월이 지났지만 헌법재판소의 최후 심판이 나오지 않으면서 국민의 삶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국민들의 심신은 지치고, 대한민국의 침몰은 조금씩 진행되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졌다. 

그렇다면 헌법재판관들은 왜 윤석열이 지른 내란의 불을 신속하게 끄지 않았을까? 최후 변론이 끝난 지도 까마득하고, 윤석열이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도대체 왜? 항간의 낭설처럼 윤석열이 지명한 헌법재판관이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여당을 지지하고 대통령을 지지하는 헌법재판관이기 때문에?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길 바란다. 그런 분이 헌법재판관이라면 너무도 실망스럽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반세기 전 대한민국의 모습에 머무를 수는 없다. 당신들은 늘 기억하며 살 것이다. 왼손에는 저울을 오른손에는 칼을 든 정의의 여신상이 왜 두 눈을 가리고 있는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립되었던가? 식민지를 벗어나고도 국제적인 승인을 얻지 못해 신탁통치를 받는 와중에 우리는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1948. 5. 10)를 치렀다.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의회가 헌법을 공포(1948. 7. 17)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1948. 8. 15)했다. 4월 민주혁명, 5월 민주항쟁, 6월 민중혁명을 거쳐 우리는 독재를 극복했고 헌법재판소를 탄생시켰다. 대한민국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선진국의 요건은 두 가지다. 경제적 풍요로움과 정치적 민주주의. 그런데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풍요로움이 없는 민주주의는 없고, 민주주의가 없는 풍요로움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건 국민 전체의 풍요로움이 아닌 소수의 풍요로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라는 민주국가도 선진국도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진단이 심상치 않게 제기된다. 경제적 침체, 국지적 전쟁, 민주주의 체제의 동요 등 일련의 세계정세를 통해 또다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건 아닌지 역사학자로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파국의 아이콘들은 어김없이 이런 정국을 틈타 떠올랐다. 전쟁광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였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은 소련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이다. 그뿐이 아니다. 민주 투사의 경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권력을 잡은 뒤에 독재자의 길을 걷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이나 이스탄불 시장의 경력으로 터키의 권력자에 올라 21세기 술탄이 되려는 에르도안 같은 인물은 민주주의의 적이라 할 만하다.

2022년 3월 9일 우리 국민이 선출한 윤 대통령은 2024년 12월 3일 왜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를 장악하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하려고 했을까? 그는 민주주의의 빈틈을 보았다고 내심 확신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일단의 세력을 등에 업고 법비의 알량한 법기술로 국민을 통치하는 길이 보였다고 착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상 밖에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우리 국민은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저항했다. 어떤 계엄군이 오더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적인 질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국민적 자긍심이 발현된 순간이었다. 그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량은 입증되었다. 그 역량이 헌법재판소를 낳은 힘이고, 헌법재판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헌법재판소는 결론이 당연한 심판의 날을 미루어 왔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대한민국이 침몰해도 괜찮은가? 아니 필자의 전망이 비관적인가?

경북 지역의 산불이 초래할 최악의 결과는 마을의 소멸이다. 항간에 유행하는 지방의 소멸은 지금 마을의 소멸이 산불로 확인됨으로써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제 수십 년간 진행된 소멸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을지 모르겠다. 여기에 더해서 이미 도시의 소멸도 진행 중이다. 경제적 침체는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었고, 자영업자들의 도산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을과 도시의 동시 소멸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지금 소멸 중이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헌재가 이번에 내란의 불을 끄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소멸 또한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헌법재판소의 현명한 재판관들이여, 제발 하루빨리 내란의 불을 꺼서 온 국민이 편안하게 잠들게 하길!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 서양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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