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이후 거리는 예상과 달리 차분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여론조사에서 헌법재판소에 대한 불신도가 높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가시는 분위기이다. 왜 이렇게 상황이 변했을까? 헌법재판소의 공이 크다. 헌재는 이번에 법과 제도를 통한 갈등 해소라는 사법부 본래 역할을 잘 보여줬다. 사법 절차가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국민 마음속에 심어줬다. 이제 다음 차례는 이재명 선거법 최종심을 맡은 대법원이다. 대법원이 이 판결을 통해 갈등과 혼란을 해소할 차례다.
헌재 탄핵 선고 이유는 탄핵 반대 측이 보기에도 설득력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헌재는 탄핵 결정문에서 계엄과 탄핵 사태에 얽힌 여러 쟁점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 쟁점들은 탄핵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근거가 됐다.
뜨거운 쟁점 중 하나는 '중단된' 계엄이라도 탄핵 사유가 되는지였다. 윤 대통령 측은 '계엄이 단시간 안에 해제됐고 이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도 않았으므로' 탄핵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헌재는 '계엄 선포로 인해 탄핵 사유는 이미 발생했다'고 했다. 계엄 선포 그 자체만으로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는 의미다. 계엄을 선포한 의도 또는 목적도 뜨거운 쟁점이었다. 윤 대통령은 계엄을 실행에 옮기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야당의 전횡과 국정 위기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경고성’ 또는 ‘호소형’ 으로 선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헌재는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계엄 선포에 그치지 않고 군경을 동원해 국회의 권한 행사를 방해하는 등의 행위로 나아갔으므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헌재, '경고성 계엄'주장 합리적 반박
'경고성' 또는 '호소형' 계엄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헌재의 판단은 계엄 선포 당일 국회에서 벌어진 일을 TV중계방송을 통해 생생히 기억하는 국민들의 상식적 판단과 배치되지 않는다. 당시 국회 본관 앞 잔디 광장에는 특전사 병력을 태운 헬기들이 줄지어 착륙했다. 무장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내 유리창을 깨뜨리며 국회로 진입했다. 이런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경고성’ 또는 ‘호소형’ 계엄이라는 주장은 통하기 어렵다. 실제로 ‘경고성 또는 호소형이라면 왜 군경을 투입했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헌재 결정문이 설득력을 높인 가장 큰 이유는 더불어민주당의 행태를 지적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헌재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야당의 탄핵 소추 남발과 그로 인한 여러 고위공직자들의 권한 행사 정지, 헌정 최초로 2025년도 예산안 증액 없는 삭감 후 단독 의결, 정부가 반대하는 법률안 일방 통과 등의 사례를 열거했다. 헌재는 “그 과정에서 피청구인(윤 대통령을 지칭)은 야당의 전횡으로 국정이 마비되고 국익이 현저히 저해되어 가고 있다고 인식하여 이를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피청구인이 국회의 권한 행사가 권력 남용이라거나 국정 마비를 초래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은 정치적으로 존중돼야 한다”고도 했다.
탄핵 선고가 나오기 전까지 탄핵 반대 측은 민주당의 줄탄핵과 입법 독주 등 국정 방해만을 내세워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탄핵 찬성 측은 민주당 행태에는 눈을 감은 채 계엄 선포라는 결과만을 갖고 윤 대통령을 비난했다. 탄핵 반대 측은 목적의 정당성을 앞세워 탄핵 반대를 정당화하려 했고, 탄핵 찬성 측은 목적의 정당성 내지 불가피성 여부는 따지지 않고 수단의 불법성만으로 탄핵 찬성을 정당화하려 했다.
야당 '국정 방해' 문제점 지적으로 공정성 더해
이에 대해 헌재는 ‘윤 대통령의 막중한 책임감’ ‘윤 대통령 판단의 정치적 존중’ 등의 표현으로 비상계엄 선포 배경에는 야당의 잘못도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피청구인 역시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한다”며 헌법 절차와 국민 설득으로 사태를 해결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 비상 계엄 선포라는 국가긴급권을 남용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헌재의 판단에는 어떤 행위를 평가할 때 목적이나 의도의 정당성 또는 행위의 불가피성 여부를 따져 봐야 하고, 설사 목적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 정당한지를 따져 봐야 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계엄 선포는 대통령으로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계엄 선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지적은 합리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정하기 어렵다. 탄핵 찬성 측이든 반대 측이든 마찬가지다. 특히 여당이나 야당에 속하지 않는 중도층 국민들 생각이 바로 이럴 것이다. 그만큼 설득력이 높다. 한 시민은 방송 인터뷰에서 “헌재가 조목조목 판단한 것을 보고 고개가 끄덕여졌다”고 했다.
헌재 선고 이후 거리가 차분해진 데는 이처럼 헌재의 설득력 있는 판정이 큰 역할을 했다. 사법기관의 역할은 법과 제도를 통한 평화적 갈등 해결이다. 이를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사법부 판단의 공감력과 설득력이다. 공감력과 설득력이 있어야 판결 결과가 자기 뜻과 다르더라도 존중하고 따르게 된다. 그 결과 갈등과 혼란이 사라지게 된다.
이재명 재판 선고 시점과 내용, 정국 최대 변수
이제 사법 절차에서 남은 가장 큰 문제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대법원 재판이다. 이 대표는 1심에서는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난 3월 26일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판결은 앞으로 실시될 대통령 선거 판도는 물론 정국 전반을 뒤흔들 최대 변수이다. 대법원이 언제 선고할지와 유죄일지 무죄일지가 핵심이다.
이 대표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2심 무죄 판결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판결 이유가 상식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이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 백현동 부지 용도를 사업자에게 특혜가 되도록 변경한 이유를 묻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용도 변경을 안 하면 국토부가 직무유기 이런 걸 문제 삼겠다며 협박해서’ 변경했다고 말했다. 1심은 국토부가 협박한 사실이 없다며 이를 거짓말로 보고 이 대표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은 ‘직무유기’ ‘협박’ 발언을 ‘백현동’이 아닌 다른 공공기관 부지에 관한 것이라며 무죄 이유로 삼았다. 당시 국회가 백현동 사건을 다룬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백현동이 아닌 다른 부지에 관한 것이라고 했으니,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대법원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판결로 이 논란을 잠재워야 한다.
선고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선고 시점이다. 대선은 6월 3일 실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5월 10~11일 대선 후보 등록과 함께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된다. 5월 29~30일 사전 투표가 실시된다. 후보 등록일 전까지 대법원이 선고하고 2심대로 무죄를 확정한다면 이 대표 대선 출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유죄 취지로 2심을 파기하는 판결을 한다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대법원이 유죄 취지 파기 판결을 하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유죄 확정 판결을 받게 된다. 그 판결이 대선일 이전에 나오기는 시간 상 쉽지 않다. 그 경우 이 대표는 사실상 유죄인 상태에서 대선에 출마하게 된다. 이는 민주당 내부는 물론 일반 유권자들에게도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대법원에서 사실상 유죄 판결을 받은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는 게 옳으냐, 대선 후보 자격은 있느냐 하는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대법원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이 대표 판결을 조기에 하지 않고 마냥 미룰 가능성도 있다. 이 대표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여러 여론 조사에서도 지지율 1위를 차지한다. 그런 이 대표이니 대법원이 조기에 판결을 하는 것에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 있다. 대법원이 제1당 대선 후보 눈치를 보느라 판결을 미룰 것이라는 얘기들이 벌써부터 항간에 나돌고 있다. 그럴수록 대법원은 법과 원칙에 충실해야 함은 물론이다.
대법원, 정치적 고려 말고 법과 원칙대로
민주당과 이 대표는 대법원에서 대선일 전에 설사 유죄 취지 판결을 하더라도 이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후속 재판이 정지될 것이라고 볼 것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이 대표는 기소된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유죄 피고인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가 정치적 논란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 당선의 정당성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막을 책무가 대법원에 있다. 최선은 대법원이 후보 등록일 이전에 확정 판결을 하는 것이다. 2심 무죄 판결이 맞는다면 그대로 무죄를 확정하고, 2심 판결이 잘못됐다면 2심에 다시 넘기는 파기 환송을 하지 말고 대법원이 직접 유죄 결론을 내리는 파기 자판을 하면 된다. 파기 자판은 전례가 드물기는 하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라면, 그리고 법적 요건에 문제가 없다면 파기 자판을 못할 이유가 없다. 재판을 미뤄 유무죄가 어정쩡한 상태로 두는 것보다 매듭을 분명히 짓는 게 공익을 위하는 길이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을 대선 시간표에 맞춰 내려 대선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은 지금 대법원이 국가 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처럼 공감력과 설득력을 갖는 판결을 하지 못하면 권위와 신뢰도에서 헌법재판소에 뒤질 수밖에 없다. 2류로 전락하게 된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 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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